불교 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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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7,230회 작성일 12-11-26 16:39본문
각종교마다 각자의 구원에 대한 방법이 있다. 어느 종교는 신의 의한 구원과 또 다른 종교는 신과 자기 자신의 구원방법이 있다. 이 가치를 중심으로 칼 올션은 연역적인가 귀납적인가를 이야기 한다. 물론 가장 현대 철학적 의미에서 종교적인 발생도 포함된다.
일단 불교는 시달림이라는 방법으로 마지막의 구원을 말한다. 죽어서 마지막에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또한 수계를 받으면 모든 업장이 사라지고 관세음보살님의 인도로 아미타 부처님이 다스리는 극락세계에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면 과연 이 부분이 부처님이 말한 인과의 법칙과 맞을까를 살펴보자. 막스 베버나 Peter L. Beger의 탈의식화, 탈 주술화를 이야기 했지만 중국에 들어와서 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현실적인 대안의 제시가 필요했고, 오늘날의 시다림으로 발전했다. 이 의례는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아들조식이 적벽대전에서 죽은 많은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중국 전통종교인 도교와 유교 그리고 불교의 합작품이다. 폴 틸리히의 종교적 열린 세계의 합작품이다.물론 이런 방법이 전통불교의 사상에서는 도저히 맥락을 같이 할 수 없다.
불교도 실은 가장 연역적인 종교이다. 전생에 완성되지 않은 인격적인 존재가 그 업력으로 인간으로 태어났고 가장 불완전한 요소가 나중에 귀납적인 방법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의례를 한번 살펴보자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 나무 관음세지 양대보살 나무 접인망령 인로왕보살
이를 보고 거불 곧 담당하는 부처님과 보조하는 보살님들을 불러 오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을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에 처음 세운 원이라고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2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3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은(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을 이루게 한다.Sam Gill이 말한 춤 즉 승무가 바로 아미타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 부처님은 힌두교로 가서 살펴보면 바로 시바신의 한 형상이다. 길상(吉祥) ·상서(祥瑞)’라는 뜻을 지니는데, 불전(佛典)등에서는 대자재천(大自在天) 등으로 옮기고 있다. 그 기원은 일설에 인도 토착민의 신앙 속에 있다고 하나, 문헌상으로는 인도 최고(最古)의 종교 ·철학 문헌인 《리그베다》에 나타나며 폭풍의 신 루드라의 호칭이라고 한다. 베다 말기에는 독립된 신격(神格)을 가졌고, 최고신 또는 우주의 최고원리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성품은 광폭하여 전적으로 파괴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파괴와 동시에 창조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인간과 함께 한다. 이는 사람이 죽어서도 해당된다.
암흑과 밝음이 세계 어디든지 함께 하는 신이다, 이분이 불교로 와서 관세음보살님이 되었다가 다시 아미타 부처님이 되었다.
여기서 가장 큰 것은 인연법에 대한 불교의 인식과 맞는가 이다. 인연은 원인과 결과의 이야기다 원인은 현재의 나와 전생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가 한데 얽이여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과정이 인연이다. 또한 영혼의 법문 중에 4대가 임시로 모여서 흩어진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정해진 결과의 하나이다. 벌써 극락이 없다는 말도 포함된다.
힌두교적인 윤회는생명이 있는 것은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것으로 이를 육도윤회(六道輪廻)라고 한다. 육도 중 첫째는 지옥도(地獄道)로서 가장 고통이 심한 세상이다. 지옥에 태어난 이들은 심한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둘째는 아귀도(餓鬼道)이다. 지옥보다는 육체적인 고통을 덜 받으나 반면에 굶주림의 고통을 심하게 받는다. 셋째는 축생도(畜生道)로서, 네 발 달린 짐승을 비롯하여 새·고기·벌레·뱀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넷째는 아수라도(阿修羅道)이다. 노여움이 가득찬 세상으로서, 남의 잘못을 철저하게 따지고 들추고 규탄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 태어나게 된다. 다섯째는 인간이 사는 인도(人道)이고, 여섯째는 행복이 두루 갖추어진 하늘 세계의 천도(天道)이다. 곧 인간은 현세에서 저지른 업에 따라 죽은 뒤에 다시 여섯 세계 중의 한 곳에서 내세를 누리며, 다시 그 내세에 사는 동안 저지른 업에 따라 내생에 태어나는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윤회의 여섯 세상에는 절대적인 영원이란 없다.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면 지옥에서 다시 인간도로, 천국에서 아귀도로 몸을 바꾸어서 태어난다. 곧 육도의 세계에서 유한의 생을 번갈아 유지한다는 것이 불교의 윤회관이다. 이 윤회는 철저하게 스스로 지은 대로 받는다는 자업자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스스로 착한 일을 하였으면 착한 결과를 받고, 악한 일을 하였으면 악한 결과를 받는(善因善果惡因惡果) 자기책임적인 것이다.
자기가 지은 바를 회피할 수도 없고 누가 대신 받을 수도 없다. 오직 자기가 지은 업의 결과에 따라서 다른 세계로의 향상(向上)과 향하(向下)가 가능할 뿐이므로,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의지와 실천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는 윤리도덕적인 측면, 즉 권선징악적인 차원에서 특히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권선징악을 넘어선 해탈의 차원에서 이 윤회설이 강조되었다.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므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반이나 극락의 왕생 등을 보다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한 생에서 다음 생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데 대한 관심보다, 현실의 삶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깊이 다스려서 언제나 고요한 열반의 세계나 불국토(佛國土)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점검하도록 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마음이 번뇌로 가득차 있는 것이 곧 지옥이고,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귀이며, 어리석음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축생이라고 보는 등, 이 순간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끊임없이 육도를 윤회한다고 보았다.
특히, 신라의 원효(元曉)는 윤회의 원인을 일심(一心)에 대한 미혹이라고 보았다. 그는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에서, “일심 외에 다시 별다른 법이 없으나 다만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일심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파도를 일으켜서 육도를 윤회한다.”고 하였다. 곧 일심을 깨달을 때 윤회를 면하여 해탈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불교에서 주장하는 재생설을 보자 과연 Jonathan Z. Smith의 종교적인 차이와 내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재생설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많이 잊혀졌지만 이곳이 본래 불교의 인연이다. 윤회는 주체가 있고 재생은 주체가 없다. 다시 말해 나의 몸과 마음은 분해가 되어 새로운 것으로 창조 된다는 뜻이다. 프라스틱이 여러 가지의 물건으로 만들어 지듯 하지만 너무 종교적 차이를 극복하려 하면 종교 자체의 존재의 의미가 살아 질 수 있다.
종교 방법론의 학자들은 새로운 이해 흡수하여 고유의 성질을 유지 한다라고 보았다.
2.다른 방법으로 구원
참선이라는 것이 있다 굳이 말하면 참선(參禪)은 화두를 일념으로 참구하는 것으로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다. 중국에 불교를 전한 달마 조사에서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염불기도, 간경, 보살행 등의 다른 수행법보다 힘들지만 더 빠르고 깊이 들어가며 지혜와 직관력이 촉발한다 하여 수행법의 으뜸으로 친다.
앉아서 하는 좌선이 일반적이고, 동정일여, 오매일여에 들어감을 중시한다. 화두 의정에 몰입하는 점에서 명상과 다르고, 자세와 호흡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점에서 건강 위주의 호흡 수련과 구별된다. 일체의 습기를 없애는 방법이다. 종교 방법론으로 이야기 하고 비교하면 가톨릭의 묵상과도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이다. 묵상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마련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속삭임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간절히 바라야 하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지 등 기도와 말씀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들을 해결해준다. 더불어 성경의 가르침과 함께 묵상 기도에 적용할 수 있는 독서, 명상, 자세와 같은 실제적인 지침을 간결하게 일깨운다. 이는 우리의 내면에 생명의 말씀이 싹트고 뿌리를 내리는 자양분이이 되어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구원의 가장 큰 조건이면 바로 자기만의 종교의 특징이다. 가장 자력신앙인 불교가 타력 신앙으로 바뀌면서 시다림의 생겨나고 그에 맞추어서 의례가 생겨난 것이다.
과연 불교의 제사의식이 유교의 죽은 자의 신격화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한번 조사해 보아야 한다. 죽은 자에 대한 영원한 생명성이 오직 제사와 축문 그리고 그 과정으로 순화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일예로 조상신은 삼국사기를 보면 상고시대에도 우리 민족은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 당시 제사는 조상신에 대한 제사가 아닌 천신에 대한 제사였다.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등은 조상신 숭배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고구려의 동맹처럼 국가의 시조를 신성시하는 국조신의 개념은 있었지만 중국과 같은 조상신의 개념은 이 시대에는 없었다.
고려 시대에도 자기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극소수의 유학자뿐이었다. 고려 말에 성리학의 도입으로 신진사대부에 속하는 유학자들이 늘어났으며 조선 초에는 유교가 국가의 이념이 되었다(앞에서도 밝혔듯이 유교도 결국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외래문화일 뿐 전통문화는 아니다). 그러나 조선 초에도 조상신을 모시던 사람은 유교를 신봉하는 소수의 양반에 불과했으며, 양반의 수는 조선 후기 숙종(1674~1720) 때까지만 해도 전체 국민의 1할도 안 되었다.임진외란과 병자호란 이후 급격한 사회변동과 함께 신분질서가 해이해지면서 양반의 수가 급속히 증가했으며, 조선 말 철종(1849~1863)에 이르면 전체 국민의 7할 정도가 양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양반의 상징으로 전 국민에게 보편화되었다. 결국 조상신 숭배가 우리 문화로 뿌리내린 것은 반만년 한민족 역사 중에서 얼마 안 되는 최근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조상신 숭배가 전통문화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무엇이 가장 불교의 시달림의식을 정당화 할 것인가를 살펴보면 역시 샤먼과 토템이다. 불교의례도 중국과 인도의 샤먼의 혼합체이다.
보통 샤머니즘은 엑스터시와 같은 이상심리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占卜)·예언·치병(治病)·제의(祭儀)·사령(死靈)의 인도(引導) 등을 행하는 주술·종교적 직능자인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현상을 말한다.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이 가장 고전적·전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역에 따라 여러 샤머니즘의 형태가 있으며, 다른 종교현상과 복합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샤먼이란 말은 17세기 후반 트란스바이칼 지방과 예니세이강가에서 퉁구스인(人)을 접했던 한 러시아인에 의하여 알려졌는데, 이 말의 어원에 대하여 19세기의 동양학자들은 샤먼의 관념 내용과 병행하여 산스크리트의 승려를 뜻하는 시라마나(śramaa), 팔리어(語)의 사마나(samaa)에서 샤먼의 어원을 찾는 수입어설을 주장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 J.네메스와 B.라우퍼 등은 퉁구스계 종족 사이에서 주술사의 일종을 지칭하는 šaman, saman, s\'aman 등에서 유래하였다는 퉁구스 토착어설을 주장하였다.
이같이 샤먼의 어원에 대한 해설은 구구하나, 대체로 퉁구스 토착어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실제로 샤먼이란 말은 퉁구스·부랴트·야쿠트족에서만 쓰이는 말이며, 또한 샤먼의 역할이 북아시아 제종족 사이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유사하지만 샤먼을 지칭하는 명칭은 여러 가지이고, 그 의미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토착화 된 신앙을 우리는 샤먼 이라하고 여기서 이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핵심 정령화가 곧 불교의 영혼 구원설이 되었다고 본다.
또 토뎀적인 사상이다. 유정이나 무정이나 라고 칭하는 부분이다. 부처님은 무정의 부분은 거의 논한 바가 없이 현실만 논했다. 하지만 인도 중기와 중국의 민간 신앙가 결합 하면서 토템에 이야기가 나온다 토템이라는 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오지브와족(族)이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 동 ·식물류(독수리 ·수달 ·곰 ·메기 ·떡갈나무 등)를 토템이라 하여 집단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이와 같이 인간집단과 동 ·식물 또는 자연물이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집단의 명칭을 그 동 ·식물이나 자연물에서 갔다붙인 예는 미개민족 사이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토템이라는 말은 이런 유의 사회현상에 있어서 집단의 상징이나 징표로서의 동 ·식물이나 자연물을 가리키는 데 널리 쓰이며, 토테미즘이란 토템과 인간집단과의 여러 가지 관계를 둘러싼 신념 ·의례 ·풍습 등의 제도화된 체계를 가리킨다. 토템은 어느 특정 개인에 관계된 수호신이나 초자연력의 원천으로서의 동물, 또는 샤먼(무당)의 동물신 등과 동일 시 되는 일이 있어, 이런 입장에서 보는 토테미즘설도 있으나 현재에 와서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토템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토템은 본래 집단적 상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어느 집단과 어느 동 ·식물, 자연물과의 결합이 토테미즘이라는 설도 그대로 긍정할 수만은 없다. 서아프리카의 표인(豹人:leopard men)의 비밀 결사에서는 표범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이것과 관계있는 의식을 행하지만 이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현상이 토테미즘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에 합치되어야한다. 그 조건 또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집단은 그 집단의 토템의 이름으로 불린다. 집단과 토템과의 관계는 신화 ·전설에 의하여 뒷받침되어 있다. ③토템으로 하고 있는 동 ·식물을 죽이거나 잡아먹는 일은 금기(禁忌)로 하고 있다. 동일 토템 집단 내에서의 결혼 은 금지되어 있다. 토템에 대해서 집단적 의식을 행한다.
이런 것이 융합 복합되어 졌다. 과연 구원론이 종교적인 입장과 사회적인 입장 그리고 관습적인 입장에서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는 예가 되고 그것이 새로운 답을 재시하고 있는지 면밀히 보아야 한다.
일단 불교는 시달림이라는 방법으로 마지막의 구원을 말한다. 죽어서 마지막에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또한 수계를 받으면 모든 업장이 사라지고 관세음보살님의 인도로 아미타 부처님이 다스리는 극락세계에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면 과연 이 부분이 부처님이 말한 인과의 법칙과 맞을까를 살펴보자. 막스 베버나 Peter L. Beger의 탈의식화, 탈 주술화를 이야기 했지만 중국에 들어와서 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현실적인 대안의 제시가 필요했고, 오늘날의 시다림으로 발전했다. 이 의례는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아들조식이 적벽대전에서 죽은 많은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중국 전통종교인 도교와 유교 그리고 불교의 합작품이다. 폴 틸리히의 종교적 열린 세계의 합작품이다.물론 이런 방법이 전통불교의 사상에서는 도저히 맥락을 같이 할 수 없다.
불교도 실은 가장 연역적인 종교이다. 전생에 완성되지 않은 인격적인 존재가 그 업력으로 인간으로 태어났고 가장 불완전한 요소가 나중에 귀납적인 방법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의례를 한번 살펴보자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 나무 관음세지 양대보살 나무 접인망령 인로왕보살
이를 보고 거불 곧 담당하는 부처님과 보조하는 보살님들을 불러 오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을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에 처음 세운 원이라고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2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3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은(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을 이루게 한다.Sam Gill이 말한 춤 즉 승무가 바로 아미타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 부처님은 힌두교로 가서 살펴보면 바로 시바신의 한 형상이다. 길상(吉祥) ·상서(祥瑞)’라는 뜻을 지니는데, 불전(佛典)등에서는 대자재천(大自在天) 등으로 옮기고 있다. 그 기원은 일설에 인도 토착민의 신앙 속에 있다고 하나, 문헌상으로는 인도 최고(最古)의 종교 ·철학 문헌인 《리그베다》에 나타나며 폭풍의 신 루드라의 호칭이라고 한다. 베다 말기에는 독립된 신격(神格)을 가졌고, 최고신 또는 우주의 최고원리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성품은 광폭하여 전적으로 파괴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파괴와 동시에 창조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인간과 함께 한다. 이는 사람이 죽어서도 해당된다.
암흑과 밝음이 세계 어디든지 함께 하는 신이다, 이분이 불교로 와서 관세음보살님이 되었다가 다시 아미타 부처님이 되었다.
여기서 가장 큰 것은 인연법에 대한 불교의 인식과 맞는가 이다. 인연은 원인과 결과의 이야기다 원인은 현재의 나와 전생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가 한데 얽이여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과정이 인연이다. 또한 영혼의 법문 중에 4대가 임시로 모여서 흩어진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정해진 결과의 하나이다. 벌써 극락이 없다는 말도 포함된다.
힌두교적인 윤회는생명이 있는 것은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것으로 이를 육도윤회(六道輪廻)라고 한다. 육도 중 첫째는 지옥도(地獄道)로서 가장 고통이 심한 세상이다. 지옥에 태어난 이들은 심한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둘째는 아귀도(餓鬼道)이다. 지옥보다는 육체적인 고통을 덜 받으나 반면에 굶주림의 고통을 심하게 받는다. 셋째는 축생도(畜生道)로서, 네 발 달린 짐승을 비롯하여 새·고기·벌레·뱀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넷째는 아수라도(阿修羅道)이다. 노여움이 가득찬 세상으로서, 남의 잘못을 철저하게 따지고 들추고 규탄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 태어나게 된다. 다섯째는 인간이 사는 인도(人道)이고, 여섯째는 행복이 두루 갖추어진 하늘 세계의 천도(天道)이다. 곧 인간은 현세에서 저지른 업에 따라 죽은 뒤에 다시 여섯 세계 중의 한 곳에서 내세를 누리며, 다시 그 내세에 사는 동안 저지른 업에 따라 내생에 태어나는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윤회의 여섯 세상에는 절대적인 영원이란 없다.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면 지옥에서 다시 인간도로, 천국에서 아귀도로 몸을 바꾸어서 태어난다. 곧 육도의 세계에서 유한의 생을 번갈아 유지한다는 것이 불교의 윤회관이다. 이 윤회는 철저하게 스스로 지은 대로 받는다는 자업자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스스로 착한 일을 하였으면 착한 결과를 받고, 악한 일을 하였으면 악한 결과를 받는(善因善果惡因惡果) 자기책임적인 것이다.
자기가 지은 바를 회피할 수도 없고 누가 대신 받을 수도 없다. 오직 자기가 지은 업의 결과에 따라서 다른 세계로의 향상(向上)과 향하(向下)가 가능할 뿐이므로,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의지와 실천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는 윤리도덕적인 측면, 즉 권선징악적인 차원에서 특히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권선징악을 넘어선 해탈의 차원에서 이 윤회설이 강조되었다.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므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반이나 극락의 왕생 등을 보다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한 생에서 다음 생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데 대한 관심보다, 현실의 삶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깊이 다스려서 언제나 고요한 열반의 세계나 불국토(佛國土)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점검하도록 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마음이 번뇌로 가득차 있는 것이 곧 지옥이고,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귀이며, 어리석음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축생이라고 보는 등, 이 순간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끊임없이 육도를 윤회한다고 보았다.
특히, 신라의 원효(元曉)는 윤회의 원인을 일심(一心)에 대한 미혹이라고 보았다. 그는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에서, “일심 외에 다시 별다른 법이 없으나 다만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일심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파도를 일으켜서 육도를 윤회한다.”고 하였다. 곧 일심을 깨달을 때 윤회를 면하여 해탈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불교에서 주장하는 재생설을 보자 과연 Jonathan Z. Smith의 종교적인 차이와 내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재생설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많이 잊혀졌지만 이곳이 본래 불교의 인연이다. 윤회는 주체가 있고 재생은 주체가 없다. 다시 말해 나의 몸과 마음은 분해가 되어 새로운 것으로 창조 된다는 뜻이다. 프라스틱이 여러 가지의 물건으로 만들어 지듯 하지만 너무 종교적 차이를 극복하려 하면 종교 자체의 존재의 의미가 살아 질 수 있다.
종교 방법론의 학자들은 새로운 이해 흡수하여 고유의 성질을 유지 한다라고 보았다.
2.다른 방법으로 구원
참선이라는 것이 있다 굳이 말하면 참선(參禪)은 화두를 일념으로 참구하는 것으로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다. 중국에 불교를 전한 달마 조사에서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염불기도, 간경, 보살행 등의 다른 수행법보다 힘들지만 더 빠르고 깊이 들어가며 지혜와 직관력이 촉발한다 하여 수행법의 으뜸으로 친다.
앉아서 하는 좌선이 일반적이고, 동정일여, 오매일여에 들어감을 중시한다. 화두 의정에 몰입하는 점에서 명상과 다르고, 자세와 호흡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점에서 건강 위주의 호흡 수련과 구별된다. 일체의 습기를 없애는 방법이다. 종교 방법론으로 이야기 하고 비교하면 가톨릭의 묵상과도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이다. 묵상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마련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속삭임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간절히 바라야 하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지 등 기도와 말씀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들을 해결해준다. 더불어 성경의 가르침과 함께 묵상 기도에 적용할 수 있는 독서, 명상, 자세와 같은 실제적인 지침을 간결하게 일깨운다. 이는 우리의 내면에 생명의 말씀이 싹트고 뿌리를 내리는 자양분이이 되어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구원의 가장 큰 조건이면 바로 자기만의 종교의 특징이다. 가장 자력신앙인 불교가 타력 신앙으로 바뀌면서 시다림의 생겨나고 그에 맞추어서 의례가 생겨난 것이다.
과연 불교의 제사의식이 유교의 죽은 자의 신격화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한번 조사해 보아야 한다. 죽은 자에 대한 영원한 생명성이 오직 제사와 축문 그리고 그 과정으로 순화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일예로 조상신은 삼국사기를 보면 상고시대에도 우리 민족은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 당시 제사는 조상신에 대한 제사가 아닌 천신에 대한 제사였다.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등은 조상신 숭배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고구려의 동맹처럼 국가의 시조를 신성시하는 국조신의 개념은 있었지만 중국과 같은 조상신의 개념은 이 시대에는 없었다.
고려 시대에도 자기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극소수의 유학자뿐이었다. 고려 말에 성리학의 도입으로 신진사대부에 속하는 유학자들이 늘어났으며 조선 초에는 유교가 국가의 이념이 되었다(앞에서도 밝혔듯이 유교도 결국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외래문화일 뿐 전통문화는 아니다). 그러나 조선 초에도 조상신을 모시던 사람은 유교를 신봉하는 소수의 양반에 불과했으며, 양반의 수는 조선 후기 숙종(1674~1720) 때까지만 해도 전체 국민의 1할도 안 되었다.임진외란과 병자호란 이후 급격한 사회변동과 함께 신분질서가 해이해지면서 양반의 수가 급속히 증가했으며, 조선 말 철종(1849~1863)에 이르면 전체 국민의 7할 정도가 양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양반의 상징으로 전 국민에게 보편화되었다. 결국 조상신 숭배가 우리 문화로 뿌리내린 것은 반만년 한민족 역사 중에서 얼마 안 되는 최근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조상신 숭배가 전통문화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무엇이 가장 불교의 시달림의식을 정당화 할 것인가를 살펴보면 역시 샤먼과 토템이다. 불교의례도 중국과 인도의 샤먼의 혼합체이다.
보통 샤머니즘은 엑스터시와 같은 이상심리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占卜)·예언·치병(治病)·제의(祭儀)·사령(死靈)의 인도(引導) 등을 행하는 주술·종교적 직능자인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현상을 말한다.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이 가장 고전적·전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역에 따라 여러 샤머니즘의 형태가 있으며, 다른 종교현상과 복합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샤먼이란 말은 17세기 후반 트란스바이칼 지방과 예니세이강가에서 퉁구스인(人)을 접했던 한 러시아인에 의하여 알려졌는데, 이 말의 어원에 대하여 19세기의 동양학자들은 샤먼의 관념 내용과 병행하여 산스크리트의 승려를 뜻하는 시라마나(śramaa), 팔리어(語)의 사마나(samaa)에서 샤먼의 어원을 찾는 수입어설을 주장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 J.네메스와 B.라우퍼 등은 퉁구스계 종족 사이에서 주술사의 일종을 지칭하는 šaman, saman, s\'aman 등에서 유래하였다는 퉁구스 토착어설을 주장하였다.
이같이 샤먼의 어원에 대한 해설은 구구하나, 대체로 퉁구스 토착어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실제로 샤먼이란 말은 퉁구스·부랴트·야쿠트족에서만 쓰이는 말이며, 또한 샤먼의 역할이 북아시아 제종족 사이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유사하지만 샤먼을 지칭하는 명칭은 여러 가지이고, 그 의미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토착화 된 신앙을 우리는 샤먼 이라하고 여기서 이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핵심 정령화가 곧 불교의 영혼 구원설이 되었다고 본다.
또 토뎀적인 사상이다. 유정이나 무정이나 라고 칭하는 부분이다. 부처님은 무정의 부분은 거의 논한 바가 없이 현실만 논했다. 하지만 인도 중기와 중국의 민간 신앙가 결합 하면서 토템에 이야기가 나온다 토템이라는 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오지브와족(族)이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 동 ·식물류(독수리 ·수달 ·곰 ·메기 ·떡갈나무 등)를 토템이라 하여 집단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이와 같이 인간집단과 동 ·식물 또는 자연물이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집단의 명칭을 그 동 ·식물이나 자연물에서 갔다붙인 예는 미개민족 사이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토템이라는 말은 이런 유의 사회현상에 있어서 집단의 상징이나 징표로서의 동 ·식물이나 자연물을 가리키는 데 널리 쓰이며, 토테미즘이란 토템과 인간집단과의 여러 가지 관계를 둘러싼 신념 ·의례 ·풍습 등의 제도화된 체계를 가리킨다. 토템은 어느 특정 개인에 관계된 수호신이나 초자연력의 원천으로서의 동물, 또는 샤먼(무당)의 동물신 등과 동일 시 되는 일이 있어, 이런 입장에서 보는 토테미즘설도 있으나 현재에 와서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토템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토템은 본래 집단적 상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어느 집단과 어느 동 ·식물, 자연물과의 결합이 토테미즘이라는 설도 그대로 긍정할 수만은 없다. 서아프리카의 표인(豹人:leopard men)의 비밀 결사에서는 표범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이것과 관계있는 의식을 행하지만 이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현상이 토테미즘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에 합치되어야한다. 그 조건 또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집단은 그 집단의 토템의 이름으로 불린다. 집단과 토템과의 관계는 신화 ·전설에 의하여 뒷받침되어 있다. ③토템으로 하고 있는 동 ·식물을 죽이거나 잡아먹는 일은 금기(禁忌)로 하고 있다. 동일 토템 집단 내에서의 결혼 은 금지되어 있다. 토템에 대해서 집단적 의식을 행한다.
이런 것이 융합 복합되어 졌다. 과연 구원론이 종교적인 입장과 사회적인 입장 그리고 관습적인 입장에서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는 예가 되고 그것이 새로운 답을 재시하고 있는지 면밀히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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