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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힌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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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449회 작성일 12-11-06 09:17

본문

1.들어가는 말
2.동일점의 부분
3.차이점
4.맺은 말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힌두교의 입장에서는 불교를 인도 철학의 아류나 통합된 것으로 볼는 경우가 많다. 왜냐 하면 불교의 발생지가 인도이고 일정 부분 인도의 철학교 종교의 모습을 수반하고 있는 경우와 특히 중후기의 대승불교의 발달은 힌두교의 多神신앙이 유입된 경우이다. 이는 당시에 신자들이 대승운동을 일으키면서 자기들의 관점에서 인도 종래의 신앙을 흡수하였고 본래 모습을 잃어가는 가운데 대중에게 호응을 받기 위하여 한것이다.
다불사상도 이렇게 전개 된 것이다.
불교의 사상은 베다를 거부 함으로써 그 시대 당시에 이단으로 취급 받았고 이 부분의 해결을 위해 베다의 많은 신들이 불교로 유입되어 보살이나 부처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 중에서 사상이나 의례의 동일성과 차이 점에 대하여 글을 쓴다.

1. 동일점 부분
1) 세상의 구성 부분
이 세상의 구성 요소에 대하여서는 사실 인도나 그리스나 아메리카나 거의 동일하다.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부터 시작하여 볼수 없는 존재로 확장이다. 그 첫째가 4대 즉 구성요소이다. 물론 약간의 출발의 차이는 있다.
힌두교의 신에 의한 것이고 불교는 스스로 나타난 것의 차이는 있지만 삶과 죽음의 표현에서는 같다. 챤도기 우파니샤드의 2편 3장에 물과 불을 말하는 부분은 불교의 삶을 말할 때 몸이 생기고 영혼이 생기는 재료가 물과 불이다. 여기서 불교의 4대는지(地)란 땅을 의미한다. 이는 견고한 성질을 의미한다. 육체로 비유하면 뼈와 같은 굳은 것을 의미하지만,
마음으로 비유한다면 보수성을 의미한다. 보수란 전통성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 영속성을 지닌 고집인 것이다. 그럼으로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현상을 그저 지키기만 하는 되는 것이다. 수(水)란 물을 의미한다. 이는 곧 유동성을 의미한다. 육체로 비유하면 피와 고름 등을 의미하지만, 유동성이란 마음으로 본다면 지식이라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항상 물이 흘러가듯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잠시도 머물지 않는 것은 찰나를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물처럼 흐른다. 화(火)는 불이다. 이는 곧 열성(熱性)이다.육체로 비유하면 체온이 된다. 불은 뜨겁다. 인간의 마음으로 본다면 이는 격정이요, 분노다. 불은 탈수 있는 것은 모두 끝까지 태우려고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태워서 재가 되면 불은 꺼지고 만다. 탈 것이 없으면 또한 꺼지게 된다. 이것이 불의 속성인 것이다. 풍(風)이란 바람이다. 이는 동성(動性)이다. 육체로 본다면 순환작용이 된다. 움직이는 성질을 말한다. 움직이는 성질이란 변동이라는 뜻이다. 형태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힌두교의 부분도 이와 유사 하다. 챤도기의 대화를 보면 더욱 확실 해진다. 힌두교와의 세상의 구성요소편은 같다고 봤도 무난하다. 그러면 神은 어떨까 대표적인 몇가지만 본다.

2) 보살과 힌두교의 신
불교의 많은 보살이 등장한 것은 대승불교와 밀교의 시대에 가장 많이 일어난 종교 밀착 부분이다. 그 중에 화엄성중 부분을 보면 화엄경보살 약찬게가 있는데 이중에 대부분이 힌두교에서 온 부분이다.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자세히 보면 아바타와 같은 개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또 다른 모습중 하나이다. 아바타는 아바따라는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 신이 지상에 강림함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한다. 산스크리트 \'아바따라\'는 힌디어에서 \'아바따르\'로 발음되는데, \'아바타\'는 힌디어 \'아바따르\'에서 맨 끝의 \'르\'발음이 탈락된 형태이다.고대 인도에선 땅으로 내려온 신의 화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은 다불신앙의 근간이 되었고 지금의 만불사상이 나오게 된 계기이다. 다음의 아수라는 불교에서 낮을 지재하면 나쁜 것을 멸하고 악으로 악을 제압하는 것 까지 해당된다. 힌두교의 나오는 귀신의 일종으로, 투쟁을 전념으로 한다. 산스크리트어의 아수라(asura)의 음역. 아리아인의 인도ㆍ이란 공통의 시대에는 아수라와 데바(deva)는 함께 신을 의미하였는데, 그들이 나뉘어져서 정주한 후에는 인도에서는 아수라가 악신을, 데바가 선신을 의미하게 되고, 인도에서는 a를 부정사로 보아서 <비천(非天)>, <비주(非酒)> 등으로 어원을 해석하였다. 신(deva)과 아수라의 투쟁은 인도문학의 좋은 테마가 되었다. 불교에서는 아수라가 해와 달을 막아서 일ㆍ월식을 행한다고 해서, 육도설(六道說)에서는 삼선도(三善道, 천, 인, 아수라)에 들어가는데, 오취설(五趣說)에서는 아귀ㆍ축생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며 사는 곳은 해저나 지하라고 한다.
아수라의 형상에 대해서 한역 경전에는 여러 가지로 기술되어 있다. 태장계(胎藏界)만다라 외 금강부원에는 이비상(二臂像)이 있으며, 그 형상을 기록한 <제설부동기(諸說不同記)>에는 적색신으로 오른손에는 검, 왼손은 방패의 상이 그려져 있다. 또한 <섭무애경(攝無碍經)>이나, <보타락해회궤(補陀落海會軌)>에는 삼면육비로 청흑색의 육신의 상이 설명되어 있다. 약찬게의 이런 부분은 너무나 많이 존재 한다. 그러면 대승불교의 꽃인 관세음보살을 보면 불교의 이야기 중에는 보살님의 전생의 많은 이야기가 있고 대부분 여자로 분하여 이 생의 중생을 수많은 자비의 눈과 지혜의 눈으로 실재적으로 행한다고 하지만 부처민의 사상에는 매우 위배되는 것으로 인과법과 인연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부분이 많다.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에는 너가 잘못해도 지성으로 관음을 찾으면 이루어 진다고 했으니 이는 인과 보의 사상에 배치 되는 것이다. 그러면 관세음은 힌두의 누구인가를 보면 사실은 오직 한 신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고 여러 신들이 장점의 합작품 같다. 리그베다에 루드라와 시바신 부분을 보면 루드라가 시바로 편하고 시바가 관세음으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루드라는
루드라(산스크리트어: रुद्र Rudra)는 힌두교의 리그베다의 신들 중의 하나로 바람과 폭풍우의 신이며 또한 사냥의 신이다. 시바(산스크리트어: शिव Śiva)는 힌두교의 삼주신 중의 하나인데, \"시바\"라는 명칭은 원래는 루드라의 별칭이었다. 산스크리트어 형용사 시바(Śiva)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친철한(Kind)\"인데, 이 시바(Śiva)라는 형용사는 《리그베다》에서 친절하면서도 또한 난폭한 신, 즉 루드라에 대해 애둘러 말하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즉, 루드라는 친절하다(Kind: 바람과 비)는 뜻에서 \"시바(Śiva)\"라고도 불리었고 또한 난폭하다(Terrible: 폭풍과 폭풍우)는 뜻에서 \"고라(Ghora)\"라고도 불리었는데, 이 중에서 친철하다는 의미의 시바라는 별칭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시바라는 별칭이 원래 이름인 루드라보다 더 널리 사용되었고, 베다 시대 이후에는, 특히 산스크리트 서사시(Sanskrit Epics)에서는, ‘루드라’라는 이름과 ‘시바’라는 이름은 동의어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두 이름은 동일한 신을 가르치는 호칭으로 서로간에 구별 없이 혼용되고 있다. 이 분들이 불교에 오면 관음으로 되며 능력은 가지고 있고 사상 적인 측면이 바뀐다. 관음보살은 이 분부중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자신을 행하지만 잘 보면 이면에서는 관음을 섬기지 않으면 해택이 없다. 왜냐하면 잘잘못 없이 관음을 믿는 사람에게 소원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관음은
천변만화하는 형태를 띠므로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脇侍)로서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의 중대(中臺) 팔엽원(八葉院)의 서북방에 거처하면서 동시에 연화부원(蓮華部院)의 주존불이기도 하다. 왼손에 들고 있는 연꽃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나타내고,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 것을 뜻하며,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는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고 장차 피어날 불성을 각각 상징한다. 관세음 또는 관음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슈와라(Avalokitesvara)의 한역이며, 아박로지저습벌라(阿縛盧枳低濕伐羅)로 음역(音譯)되기도 한다. 밀호(密號)로는 정법금강(正法金剛) 또는 청정금강(淸淨金剛)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현장(玄奘) 이전의 구번역에서는 광세음(光世音), 관세음(觀世音), 관음(觀音), 관세자재(觀世自在) 등으로 번역했으나, 신역에서는 관자재(觀自在)라고 번역했다.
원어의 아바로키타(Avalokita, 觀하다)와 이슈와라(i○vara, 신 또는 自在天)’의 합성어이기 때문에 더 정확한 번역이다.≪법화경 法華經≫ 보문품에 나오는 ‘관음’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해탈시켜 준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신·구역의 번역자가 접한 산스크리트 원본의 문자가 전래과정에서의 상위 때문에 서로 달랐을 수도 있다 라서 여러 가지 번역어가 생겨났다고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몇 가지 역어 중에서도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구역의 ‘관음’이란 용어이다. 그 종류로는 6관음이 일반적이며 그 중 성관음(聖觀音)이 본신이고 나머지 다섯 가지 모습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그 6관음의 역할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① 성관음(聖觀音):주로 아귀도를 구제한다. ② 천수관음(千手觀音):주로 지옥중생을 구제한다. ③ 마두관음(馬頭觀音):주로 축생의 고통을 구제한다.④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주로 아수라의 고통을 구제한다. ⑤ 준제관음(准提觀音):주로 인간의 고통을 구제한다. ⑥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주로 천상의 고통을 구제한다. 이 관음보살의 정토, 즉 상주처는 인도 남부의 말나야(Malaya)산 동쪽 구릉인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이라고 믿어졌는데 관음도량으로 유명한 우리 나라의 동해안 낙산사는 바로 여기서 절 이름을 따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절강성 주산열도(舟山列島)의 보타산(普陀山) 진제사(晋濟寺)를 관음보살의 거처로 믿고 있다.≪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따르면 마음속으로 관음보살을 간절하게 염원하면 불구덩이가 연못으로 변하고 성난 파도가 잠잠해지며, 높은 산에서 떨어져도 공중에서 멈추게 된다고 한다. 또한 참수형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목을 치는 칼날이 부러지게 된다고 하는 등 관음보살은 갖가지 재앙으로부터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관음보살은 현세이익 신앙의 대표적인 경배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종래의 불교신앙이 자력적 특성을 지녔음에 비해 관음신앙은 다분히 타력적 요소가 짙다. 오히려 이 점이 대중들에게 호응받을 수 있었으며, 불교의 종교적 가치를 높이기도 한다. 민간신앙으로 널리 유포되었으니만큼 다양한 조각과 회화 등으로 관음상을 나타내었다. 현존하는 아잔타의 제26굴과 오랑가바드 및 칸네리 등에는 각각 ‘관음6난구제도’와 ‘8난구제도’, ‘10난구제도’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모두 관음보살이 현세이익적인 보살로서 널리 신봉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관음보살상은 보통 머리 위에 화불(化佛)을 가지고 있거나 때로는 천관(天冠)을 쓴 모습인데, 이것은 이란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살펴 본 것과 같이 동일점의 신앙과 신적인 모습이 너무 많아서 열거과 힘들 정도 이다. 그러면 차이 점은 무엇인가


3.차이점
힌두교의 유신론과 어느 부분에 나타나는 일신론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 즉 챤도기의 2편1장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 사람을 보는 법의 차이가 있고 세상을 보는 법의 차이가 있다.
불교의 무신론 무아론 부존재론 그리고 재생설 힌두교의 윤회설 등 많은 다른 점이 있다.

1)유아론과 무아론
유아론은 힌두교의 사상 중 하나이다. 우파니샤드에 보면 범아론의 등장은 유아론의 핵심이면 아과 곧 우주의 밑거름 힌두교의 핵심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는 아트만론이다. 석지형스님의 유아론에서 보면 우주를 창조하였으며, 유정계를 자신의 생각과 꿈으로 지배하는 브라흐만신을 우주적인 존재라 한다면, 아트만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신적인 존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트만이 있음으로서 인간은 우주와 동일시되는 하나의 소우주를 형성한다. 지혜로운 사람이 아트만을 깨달음으로써 윤회와 생존이 신적인 몽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 브라흐만과 하나가 됨으로써(梵我一如) 고뇌를 벗어나 해탈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아트만을 인식하고 자신의 본질을 깨달으며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려운 지식의 습득과 수행과정, 그리고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 베다를 비롯한 오의서(奧義書)의 암송, 우파니샤드 철학의 습득, 미망사를 비롯한 논리적 학파의 가르침 등이 아트만을 인식하고 이를 확장하여 신과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아트만이 절대적인 순수의 경지에 이를 때 우주와 하나가 되어,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지며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 자체가 바로 아트만으로 인식된다. 다시 \'만물이 바로 자아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 만물과 하나가 되는 사람에게 괴로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만물과 하나가 되며 순수하고 육신이 무화되어 죄에 물드는 일이 없다.
이에 반해 미산스님의 무아론은 우선 논리적으로 아트만론에 반대되므로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 동안 이루어진 신학과 철학적인 접근방법과 기득권에 비판을 가하는 셈이다. 둘째, 아트만론보다 상위의 개념이 되고 있다. 아트만론에서 신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결국 무아의 상태에 이르러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이루는 점에 비추어 무아론은 한층 높은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무아론은 고도의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사회에 어울리는 이론이다. 기능의 분화가 심하고 구성원이나 팀간에 정보교환이나 고도의 협력이 필요한 현대사회에서도 집단이기주의를 배제하는 무아론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이 유무의 차이가 결국은 불교의 많은 특이한 이론을 만들었다. 보트갈라나 설일체유부 유식학 등 유아론의 벗어난 무아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었다.

2)윤회설과 재생설
힌두교의 윤회설은 일단 유아론을 근거로 한다. 유아설은 12연기중 5연기가 이에 대한 관점이다. 윤회는 곧 주체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윤회설은 윤회설은 〈우파니샤드〉에서 어느 정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성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화이도설(五火二道說)이다. 먼저 \'오화설\'은 제사에서 사용되는 제화(祭火)와 관련지어 인간이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5단계의 과정을 설명한다. 죽은 사람을 화장하면 그의 영혼은 먼저 달로 간다. 다음에는 비가 되어 지상으로 내려와 식물의 뿌리에 흡수되어 인간의 음식이 된다. 남자가 먹을 경우 그 영혼은 정자가 되어 모태로 들어가 재생한다. 즉 \'달-비-식물-정자-모태\'의 단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발전한 \'이도설\'에서는 신도(神道)와 조도(祖道)라는 2가지 과정을 설정한다. 먼저 신도는 숲속에서 고행으로 열심히 수행한 자가 사후 화장의 불길을 타고 천계로 가서, 신들의 세계를 포함한 다양한 세계를 거치면서 이윽고 브라마(梵天)의 세계에 도달해 다시는 되돌아오는 일이 없는 과정이다. 다음 조도는 제사와 보시로 선행을 쌓은 자가 사후 화장의 연기와 함께 천계로 가서 조상들의 세계를 포함한 여러 장소를 거쳐 달에 이르고, 여기서 전생의 업력이 다할 때까지 머물다가 앞에서 말한 오화설의 단계대로 지상에 재생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악업을 일삼은 사람은 신도와 조도의 어디로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우파니샤드의 이야기면 리그베다의 발전된 개념이다.
재생설은 불교 고유의 것이다. 미산스님의 박사논문에서 찰나와 재생설이 이야기 된다. 재생설은 찰나의 시간에 무한히 변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찰나는 1/17초이고 이 시간에 영혼이 넘어가면 분해되어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 조합한다는 것이다. 윤회는 주체가 있어 변화지 않지만 재생은 주체가 나 중에 만들어진다. 금을 높이면 또 금이 되는 것이 윤회면 금을 녹여 은를 만드는 것이 재생이다.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4. 맺은말

실제로는 사실 종교간의 분리가 매우 어렵다. 더구나 같은 지역에서 사상을 기초로 한 힌두교와 불교의 구별은 상당히 힘들다. 엘리아데의 생각, 판단중지로 종교를 볼 것인지 뒤르겜의 사회의 발전과 인식으로 볼 것인지는 아직도 우리에게는 숙제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분리하는 것이 종교학과의 학문중 하나라고 본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불교와 힌두교의 사상적인 혼돈을 느끼고 특히 불자들의 혼돈과 불교의 고유 개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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