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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751회 작성일 12-11-3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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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아트만의 다양한 속성과 상징에도 불구하고, 이를 크게 대별하여 브라만의 본질은 세 가지차원으로 설명된다. 그 세 가지 본질적 특성은 존재(sat), 의식(cit), 환희(ānanda)다. 이를 \"사트-지트-아난다(sat-cit-ānanda)\"라는 공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존재로서의 브라만은 『리그베다』에서 \'비존재\'와 함께 언급된다. \"비존재(asat)\"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현현(未顯現)\"이고, \"존재(sat)\"는 \"현현(顯現)\"이다. 이른바 비존재로서 \"드러나지 않고\" 있던 \"무\"가 \"존재\"에로의 발동을 시작했는데, 그 발동은 \"무\"의 내적인 에너지와 열기(타파스)로서의 희망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비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에서의 \"무\"는 아니었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러한 창조의 과정에서 브라만이 존재의 실체로 개입하고 있다. 이는 마치 노자(老子)가 말하는 도(道)의 창조적 기능으로서 말하는 \"유생어무(有生於無)\"와도 비교된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는 비존재에서 존재로 이어질 수 없다고 함으로써 기존의 설명을 정면으로 반박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비존재’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무\"가 아니라 다만 \"드러나지 않은 것(asad)\"일 뿐이라는 점에서 모순은 해결 된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는 이 존재가 진리이자, 아트만으로서 바로 너 자신이라고 말한다. \"만물의 근원인 그 미세한 존재를 세상 만물이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진리다(tat satyam)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sa ātmā) 그것이 바로 너다(tat tvam asi)\"
의식(cit)으로서의 브라만/아트만은 어떤 모습인가? 제1원리로서의 아트만/브라만은 인간의 내면의 \'의식(意識)\'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브라만이 우주의 원형적 본질이라면 아트만은 인간 내면의 원형적 의식이다. 이른바 인간의 육체적 영역을 넘어선 우주적 의식과의 연합이다. 의식의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과 인식을 주관하는 자, 곧 내면의 존재인 아트만을 깨닫는 것이 요청된다. 이 아트만이 바로 의식의 주체, 혹은 의식 그 자체로서 보는 자를 보고, 듣는 자를 듣고,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고 깨닫는 자를 깨닫는 자다. 이 아트만은 불멸의 의식이다. 이 불멸의 의식이 브라만이자 불멸 그 자체를 \"아는\" 자다. 이 불멸의 존재는 \"보이지 않지만 보는 자요, 들리지 않지만 듣는 자이며, 생각할 수 없지만 생각하는 자요, 알 수 없지만 아는 자다.\"
환희(ānanda)로서의 브라만은 어떤 모습인가? 환희는 고통을 넘어서 있다. 고통의 문제가 브라만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환희\"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아트만을 알게 되면 고통과 죽음의 문제도 극복되고 브라만의 궁극적 상태인 \"환희\"에 이른다. 『우파니샤드』에서의 환희(bliss, 至福)는 브라만의 속성이나 상태를 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브라만의 독특한 본질 그 자체로서, 환희를 \'지닌 자(ānandin)\'라기 보다는 환희(ānanda) \'그 자체\'다. 이러한 환희의 상태는 꿈 없는 깊은 숙면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다. 주관과 객관의 대립적 구별을 넘어선 깊고 꿈 없는 잠의 상태로서 브라만과 일시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거나, 모든 고통이 사라진 상태로서의 더 없는 기쁨이다. 이러한 상태는 주객 구분 없는 주체적 의식이요(νόησις νοήσεως). \'적멸(寂滅)/적정(寂靜)\'의 순수 의식이며, 대승적 차원의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이다. 환희로서의 아트만(ānanda-ātmānah)의 \"기쁨(sukham)은 무한함(bhūmā)에 있다.\" 기쁨을 뜻하는 \'수캄(sukham)\'은 \'캄(kham)\'즉, 대공(大空, ākāsa)과 어근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기쁨은 무한과 결속된다. \"환희(ānanda)\"라는 개념이 \"무한(ananta)\"과 어근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트만은 불멸의 환희가 된다.



이러한 브라만/아트만의 본질적 속성을 말하지만 여전히 브라만은 불가지성(不可知性)의 존재로 남아있다. 다만 알 수 있는 길(可知性)이 있다면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부정의 길\'을 통해 더듬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부정의 길’을 통한 길고 긴 대화 속에서 마침내 얻게 되는 것이 \"브라만/아트만이 바로 너다\", \"그것이 너다(tat tvam asi)\"라는 지고한 명제 앞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의식-환희로서의 브라만은 세계와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브라만/아트만은 앞에서 ‘제1원리’로서의 우주적 원리임을 보았다. 이 제1원리가 세계 속에 나타나는 방식이 실재론(realism), 유신론(theism), 범신론(pantheism), 관념론(idealism)이라는 4범주의 형태로 드러난다. 물론 더 다른 각도에서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브라만의 세계를 실재론적 입장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유신론이나 관념론적 입장에서 바라 볼 것인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 따라서 인도철학, 특히 『우파니샤드』의 철학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 되거나 해석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라만과 세계에 대한 이 같은 4가지 설명 방식은 『우파니샤드』에서 부분적으로 모두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우파니샤드의 브라만을 해석하는 학파가 각각 다르게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같은 차이점들은 모두가 서로 모순됨이 없이 하나의 일원론적 경향으로 발전해 갔다. 심지어 이원론적 전개를 보이는 상키야 철학적 실재론도 궁극적으로는 브라만/아트만과의 합일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브라만/아트만은 우주 만물의 제1원리로서 유일 실재이지만, 그 아트만은 바로 \"나\"라는 존재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브라만의 영적 원리를 생각해 보게 된다.『우파니샤드』의 방대한 문헌 전체가 결국은 영적 원리로서의 참된 \"나(ātman)\"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 \"그 진리가(tat satyam) 아트만이요(sa ātmā) 바로 너다(tat tvam asi).\"라고 말하는 것도 진리는 “나” 속에 있는 내면의 영적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브라만/아트만의 영적 원리는 우주의 인격신으로 발전한다. 우주적 실재로서의 브라만은 후기『우파니샤드』의 시대로 갈수록 관념론적 차원이나 실재론적 차원에서 유일신(唯一神)적 차원으로 점점 발전해 가면서, 인격신 이쉬바라(īśvara)로서의 브라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대『우파니샤드』에서 후기『우파니샤드』로 갈수록 신관이 변해간 것을 보게 되는데, 다양한 신들이 출현하는 다신론(polytheism)에서 점차 브라만/아트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신(monotheism)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새로운 변화는 브라만/아트만이 \"주(主)\"라는 뜻을 지닌 \"이샤(īśa)\" 혹은 \"이쉬바라(īśvara)\"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격신으로서의 브라만의 통치를 뜻하는 셈이다. 이러한 \"주\"로서의 이쉬바라도 나아가서는 \"최고의 주\"라는 \"파람 이쉬바라(parameśvara)\"로 불리게 되었다. 만물을 지탱하는 자로서의 아트만이 이제 \"주\"라는 인격신으로 불리고 있고, \"주\"가 아닌 개체 영혼은 자신이 추구한 향락으로 인해 세상적인 것들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개체성에서 벗어나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아트만을 깨닫게 되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보게 된다. 이것을 깨닫는 즉시 \'파람 이슈바라(parameśvara)\'로서의 브라만/아트만이 된다. 이 지고신과의 합일은 \'그에 대한 명상(abhidhyāna)\'을 통해 그와의 연합을 이룸으로써 속박을 벗어나 해탈을 누리게 된다. 브라만과의 합일은 근원적인 내적 실재와의 참된 연합이기에 \'스스로 존재함\'에 이르는 해탈과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해탈은 동시에 모든 \"세상의 환영(viśva-māyā)\"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이 일종의 \"브라만의 열반(涅般)\" 곧, \"브라마-니르바나(brahma-nirvāna)\"다.
아트만은 우주와 인간 내면의 \"내적인 안내자(antaryāmin)\"로서 통치력(prasāsanam)을 지니고 우주의 창조와 보존 그리고 파괴 대 융합의 전체 과정을 이끈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 언급하듯이 \"이 세계는 브라만에서 생겨나와 다시 브라만으로 돌아가고 브라만 안에서 움직인다.\" 이는 브라만의 창조와 파괴 융합의 전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브라만의 역할은 \"타잘란(tajjalān)\"이라는 산스크리트어에 함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타잘란(tad-ja-la-an)\'은 \'시작\'을 의미하는 \'ja\'와 \'끝\'을 의미하는 \'la\', 그리고 \'지속\'을 의미하는 \'an\'의 합성어로서, 브라만(tad, 그것)이 우주의 시작이요 끝이며 지속이다. 알파요 오메가며 영원이다. 그런 점에서 브라만/아트만은 초월이요 불멸이며 신적이다.
이 불멸의 신적 아트만에 이르는 해탈(moksha, 解脫)의 길 대하여『우파니샤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공통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비록 이원론을 전개하는 상키야 철학에서는 해탈의 방식이 조금 다르기는 해도 해탈의 기본적 전제는 \"지식(깨달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지식(지혜)\"을 통한 해탈이라고 하는 이러한 전제는『우파니샤드』 전체의 내용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혜로서의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선적으로 아트만이 유일한 일자(一者)로서의 참된 실재라는 것과, 다자(多者)로서의 세계는 환영(māyā)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환영\"으로 구성된 다자의 세계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으로서의 \"지혜(깨달음으로서의 지식)\"가 곧 해탈에 이르는 필수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환영(幻影)적 세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avidy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바로 아트만에 대한 이해에서 가능하다. 무지는 \"고통\"이나 \"족쇄(bandha)\", 혹은 \"집착(graha)\"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영-무지-윤회\"라는 3중적 세계의 실상을 동시에 통찰해야 한다. 족쇄를 끊는 검으로서의 통찰은 궁극적으로 \"모든 욕망의 비움(yatra kāmāh parāgathāh)\"이라는 형식에서 성취된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고통의 실존에서의 해방, 그것이 모든 종교의 궁극적 추구이기도 한 것처럼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해탈의 길도 고통과 죽음의 극복으로서 구원의 길이요, 불멸의 길이다. 환영에서 벗어나 \"내가 곧 푸루샤\"요 \"내가 곧 아트만/브라만이다\"는 실재의 실상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비밀스런 가르침으로서의 해방의 길, 곧 해탈의 최종적인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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