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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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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543회 작성일 13-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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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어가는 말
2.공동생산 공동분배
3.그 시대의 계급타파
4.제법무아
5.맺은 말
1.들어가는 말
한 종교가 오랜 세월동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교리적인 우수성 내지는 현실적응성이 뛰어나든가 아니면 그 종교만의 내적인 생활방식이나 시스템의 우수성도 해당된다. 일예로 천주교의 제사나 불교의 생산운동이 이에 해당되고 또한, 개신교의 사회화의 빠른 적응도 해당된다.
종교 방법론 적으로 보면 종교의 자기 변화가 스마트가 말한 6가지 방법으로 적응해 간다. 여기서는 불교의 적응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2. 공동생산 공동분배
1) 대승불교(중국당나라)의 위기
회창폐불(會昌癈佛): 회창법난(法難). 당 무종(武宗) 회창 연간(841-848)에 일어난 폐불 사건. 무종은 원래 도교를 신봉하였는데, 제위에 오르자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3년(843) 조칙을 내려 수도와 주군(州郡)에 절 각 1개소와 몇 몇의 승려만 남기고 26만 명을 환속시켰으며, 4만 개의 사원을 헐어버렸다. 불상, 동종 등은 주전(鑄錢)토록 했다. 당시 사원은 4만 4천개, 승려는 26만9천여 명이었으니, 무려 90%가 없어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종파는 거의 멸종할 정도였다. 오직 살아남은 것은 선종과 정토종이었다. 무종이 사망 후 선종은 점점 상승기류를 타기 시작하여 당말 오대에는 오직 선종 일색이었다.
2)백장회해의 생산중심의 선
선불교는 인도에서 건너온 보리달마(?-495)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하나의 큰 교단(종파)으로 발전한 것은 마조도일(709-788)과 그의 제자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에 의해서다. 마조도일은 조사선(祖師禪)을 완성시킨 선승이다. ‘평상적인 마음이 곧 진리다(平常心是道)’ ‘그대가 애써 찾고 있는 부처는 곧 그대의 마음이다(卽心是佛)’은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선을 일상 속으로 끌어 들인 장본인이다.
보리달마 이후 선은 4조도신(580-651)과 5조홍인(601-674) 그리고 6조혜능(638-713) 때까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다. 그러나 여전히 당(唐) 초기부터 융성했던 천태 ‧ 화엄 ‧ 정토 ‧ 율종 ‧ 법상(유식)종 ‧ 구사종 ‧ 밀종(밀교) ‧ 삼계교 등 8종에 비하면 턱없는 열세였다.
역사서에서는 도신과 홍인의 문하에는 500명이나 되는 많은 수행자들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단지 하나의 수행자 집단으로서, 선종은 이른바 당(唐) 초기에 거론되고 있는 8종의 대열에도 끼지 못했다. 아직 선불교는 독자적인 선원이나 사원, 또는 참선 도량이 없는 상태였다. 선승들은 주로 율종 사원이나 또는 여타 사찰에서 당우 한 채를 얻어 거주했다. 말하자면 더부살이 형태의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승들이 율종 사원의 더부살이에서 독립하여 비로소 하나의 교단(종파)으로 성장 발전하게 되는 것은, 백장선사(720-814)가 선원의 정관인 󰡔백장청규󰡕를 제정하여 공포한(700년대 말경) 이후의 일이다. 달마로부터 300년 후, 9대째에 이르러서다. 이에 대하여 송 대의 한림학사이자 불교도인 양억(楊億, 974-1020)은 「선문규식(禪門規式)」에서 “선문이 독립하여 행해진 것은 백장회해로부터 시작되었다(禪門獨行, 由百丈之始)”고 밝히고 있다.
백장회해가 집대성한《백장청규》는 선원총림(叢林)의 생활규칙과 운영방침, 그리고 각자가 지켜야할 법규와 소임(직책) 등을 제정한 선원 최초의 정관이었다. 오늘날 하나의 사단법인을 운영하는데도 반드시 정관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백장청규󰡕는 선종총림의 법전(法典)이었다. 이 󰡔백장청규󰡕를 바탕으로 비로소 선불교는 체계적인 틀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이어 백장산 백장사에 선종 최초의 총림인 백장총림을 창설하게 된다. “덕망이 높은 이는 장로(長老)이고, 교화에 뛰어난 선지식은 방장(方丈)이다. 불전(佛殿)은 세우지 않고 오직 법당(法堂=說法堂)만 세운다. 수행자는 모두 승당(僧堂)에 거처하도록 하고, 앉는 자리는 수계의 연차에 따른다. 상당법어는 5일마다 한번 씩 하고, 아침저녁으로 모여 법문을 듣는다. 공양은 아침에는 죽(粥), 점심에는 밥(齋), 두 끼만 먹는다. 보청법(普請, 울력)을 시행하여 자급자족하며 상하 구별 없이 모두 일한다.”
이상이 백장청규의 대강이다.
선원의 생활규칙인 󰡔백장청규󰡕의 출현과 ‘백장총림 창설’은 선불교 역사상 최초의 일로서, 이것은 곧 선종 교단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당말 송대에 이르러 중국 불교계를 휩쓸게 되는 서막의 종(鐘)이기도 했다.
사실 선불교는 백장회해 이후에는 공전절후의 발전을 거듭한다. 곧이어 일어난 당 무종의 회창폐불사건(845-847)은 불교계의 판도를 180%로 바꾸어 놓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모든 종파는 거의 다 멸절(滅絶) 상태에 빠지고 오직 살아남은 종파는 선종과 정토종뿐이었다. 특히 산악에서 노동으로 자급자족하면서 권위주의를 부정하면서 선불교는 무종 사후 점점 조야(朝野)의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일반 지식층 사이에서도 많은 이들이 선불교에 귀의했다. 당송팔대가 가운데 한유(韓愈, 768~824)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두가 선에 투신했다. 기존의 불교가 교학적, 권위적이었다면, 선불교는 서민적이었으며 수행법도 인간 존재에 대한 응시였다.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것은 더욱 매력적이었다. 특히 선승들이 쏟아내는 탈속 무애한 선시(禪詩)에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은 모두 탄성을 질러댔다. 문인들이 투항하자 일반은 바람이 쓸고 가듯, 당말 송초는 오로지 선종 일색이었다. 도원(道源)의 󰡔전등록󰡕(1004년 저술) 6권 「백장회해장(章)」에는 한림학사 양억(楊億, 974-1020)이 지은 「선문규식(禪門規式」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고청규서(古淸規序)」라고도 하는데, 백장선사가 제정한 청규의 원형을 전하고 있는 자료다. 거기에는 백장회해의 말을 빌려 당시 선불교가 독립하게 되는 전후 과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소실(少室, 달마)로부터 시작한 선종은 조계혜능 때까지 대부분 율종 사원에 거주하였다. 비록 별도로 선원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설법이나 거주하는 것이 여전히 법규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마음에 과제로 남아 있었다. 조사의 도(道)를 널리 펴고 미래에까지 그 가르침이 끊이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어찌 아함 등 기타 부파와 행동을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주장하는 바는 대소승의 계율에 국한하지 말고 선원 독자적인 청규를 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소승의 계율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마땅히 넓게 고찰, 절충하여 올바른 규범을 제정하고자 한다. 선원에 맞는 청규가 있어야만 올바로 수행에 힘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새롭게 뜻을 세워 따로 선종사원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이상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육조혜능 때까지만 해도 선승들은 주로 율종 사원에서 더부살이로 살았다. 그러나 율종에서 행하고 있는 법규와 설법은 선원과는 맞지 않았다. 율원은 계율을 준수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선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표어처럼 마음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율원은 율장과 경전 탐구를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했지만, 선원은 조사어록의 탐구를 통해 깨달음에 도달했다. 계율을 공부하는 율종과 마음의 존재를 규명하는 선(禪)은 그 목적은 같았을지라도 방법은 달랐던 것이다.
독탈무의(獨脫無依)한 절대적인 경지, 무소유, 무집착의 정신세계를 추구했던 선승들의 입장에서 더부살이는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사견이지만 현실적으로 비애감 같은 것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독자적인 교단과 수행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별도로 선원을 두었지만, 설법이나 거주하는 것이 법규에 맞지 않아서 항상 마음의 과제였다.”는 말은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기존 교단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반을 확립하기 까지는 늘 도전과 두려움이 따른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경제적인 문제였다. 많은 대중이 공주(共住)하는 총림에서 의식주(衣食住) 문제는 그 어떤 과제보다도 큰 문제였다. 물론 기존 교단(종파)처럼 세력가들이나 신자들의 기부에 의존할 경우, 그것은 익숙한 일로서 그다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이것은 선승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이것은 세속적인 유혹을 끊고 독자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명제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시주 단련에도 적지 않은 공(功)과 시간을 쏟아야 했다. 독립성을 유지할 수도 없을뿐더러, 율종이나 교종 등 기성 교단을 그대로 추종하는 꼴이었다. 백장선사가 심사숙고 끝에 제시한 방안이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보청법(普請法, 作務, 노동, 울력)이었다. 보청은 세력가들이나 신자들에게 의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토지를 개간하여 자급자족하겠다는 의지로서, 이는 기존 교단과 확연히 차별되는 혁신적인 제도였다. 또한 이것은 인도불교가 전통적으로 벌레나 곤충 등 살생을 이유로 농경(農耕)을 금지한 것과는 다른 것으로, 구교단의 개혁이요, 선종교단의 자긍심이었다.

3.그 시대의 계급타파
1)부처님 당시부터
부처님의 십대제자들은 대부분이 바라문족이거나 왕족계급이었는데 우파리 존자만 유일하게 노예계급 출신이다. 그러나 우파리 존자는 바로 부처님의 교단이 계급과 종성에 평등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노예계급 출신이 종교지도 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교단에서 계급 평등을 실현하셨다. 우파리 존자가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우파리 존자는 계율을 가장 잘 지키는 존자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불멸후 제 1회 결집 때에 우파리 존자가 律을 외워 냄으로써 律藏을 결집하게 됐다.
2)원효대사의 민중화
당시의 문맹률은 90%가 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각 경전은 대승불교 학자들에 의해 교학중심으로 관념화, 이론화되어 일반대중들이 불교를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부처님 말씀이 현학적으로만 번역되고 연구되는데 빠져가는 것이다. 이에 원효는 본인의 깨달음과 함께 실천적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 곧 불국토를 이루는 것임을 온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라고 노래하고 춤추며 저자거리를 다니며 거지나 어린 아이와 노인을 구별 않고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불도를 전한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불도를 이룰 수 있으니 이 때 염불에 의한 민중불교가 뿌리내리게 된다. 당시의 귀족세계에게 원효대사의 이러한 기행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무엇보다도 경전이론에서도 대가였으니 그 누구도 어쩌지를 못했다. 원효대사의 여러 저술서는 물론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중국, 일본은 물론 예나 지금이나 인정을 넘어 존경의 경탄까지 받는 명 주석서이다. 그야말로 본각을 이룸은 물론이요, 이론과 실천을 따를 자 없는 인류 애자였던 것이다. “중생이 아프니 보살도 아프다.”는 유마경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안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도 아픈 이유를. 이것이 바로 원효대사가 잘 나가던 엘리트 승려에서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낮은 곳에서 받드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던 이유이다. 비슷한 시기를 함께한 육조혜능선사와 원효대사가 실제로 만났었다면 불교의 역사는 핵융합에 해당되는 발전을 능가했을 것만 같다. 원효대사가 육조혜능보다 20년 정도 먼저 태어나셨으니 인연만 닿았다면 선종의 중조와 민중불교의 효시로서 대승실천의 무애인(無碍人)이었던 두 걸출한 부처와 부처가 서로를 알아보았을 터이다. 이것이 불교의 무애자비고 곧 평등의 세계이다.

4.제법 무아
모든 것이 실체로 보지 않고 무상으로 볼 때 무아가 나온다. 불교는 베다를 부정하므로 써 인도에서 이단을 취급을 받았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무아 사상이다. 이 사상은 힌두교의 범신론 과 범아일여 사상을 부정하고 연기설은 끝은 무로 끝나는 것이다. 후기에는 설일체유부나 독작부에서 유아를 주장하였으나 불교계의 이단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무아의 확장개념인 공사상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선법의 하나이다. 이것이간화선이다. 간(看)은 보는 것을, 화(話)는 화두를 의미한다. 이는 인도의 선정(禪定)과는 매우 다른 중국 선종만의 독특한 수행 양식이다.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과 돈오(頓悟)를 주장하는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으로 분파되었는데, 안녹산의 난 이후 혜능의 제자인 신회(神會)의 활약으로 남종선이 주류가 된다. 남종선은 다시 임제종(臨濟宗)ㆍ조동종(曹洞宗)ㆍ법안종(法眼宗)ㆍ운문종(雲門宗)ㆍ위앙종(潙仰宗)의 오가(五家)로 분파하게 된다.
이 중 가장 융성하여 선종의 정통으로 남은 것은 임제종이다. 간화선은 당대 조주종심(趙州從諗)선사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라는 말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송대에 임제종의 정통을 계승한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는 화두를 퍼뜨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고요히 앉아서 좌선하는 조동종의 묵조선에 반대하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간화선은 임제종의 정통적인 수행법이 되었으며, 임제종이 융성함과 동시에 널리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간화선을 받아들인 사람은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최초이며, 그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저술하여 널리 퍼뜨렸다. 이후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惠諶) 등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면서 우리나라에서 선수행의 정통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무아와 공사상의 핵심이다.

5. 맺음말

종교는 시대를 지나오면서 그 시대 민중이 바라는 모습으로 바뀌고 그중에 몇 가지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 사회의 바램을 실현하고 있다. 그 것이 전통이나 독보적인 상상과 시스템으로 남아 다른 종교와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인 사상적인 면은 인도철학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고 아직도 불교만의 분리는 요원한 상태이다. 다른 종교들도 그리이스 로마 철학에서 분리가 힘든 것과 같다. 어떤 한 전통이든지 민중과 별리하면 사라지고 같이 호흡하면 살아남아 그 자리를 유지해야 된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예로 써 종교 전쟁이나 세계대전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종교의 민족주의 권력의 전체주의 가장 큰 아픔을 간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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