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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와 불교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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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823회 작성일 13-07-02 14:33

본문

1.노자에서 본무 그리고 비유비무 까지.그리고 현학과 불교의 유무관
에 대해서 정리하라.
불교의 중국화에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 얼마만큼 중국철학(노자사상이 불교에 유입 되었으며,격의 불교를 이야기 할 때 얼마만큼 이야기 되었는가의 문제이다.역경(譯經)시에 어느 정도의 언어적인 개념을 파악하고 했는 지도 살펴 보아야 한다.
노자의 본무을 말할 때 왕필의 이야기가 첨부 된다.왕필의 주에 보면 無는 有에 대대 개념이고,또한 本과末도 그러하다.이때에 무는 완전히 없다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고, 유와 소통할수 있는 개념이다.이것은 『노자』의天下萬物生於有,有生於無와 같다.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에서 비롯되고,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현학적인 관점으로 본면 모든 사물은 무을 내포하고 있고 무에 운용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노자의 유무관은 道,無,有의 개념이다.무와 유의 구별이전에 도가 있고 이는 유무의 본 개념이고 도를 논하면서 유무가 만들어 진것이다.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聖人(성인)을 無(무)를 체득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과 상통한다. 현학의 이러한 성인관은 본체로서의 무를 강조함으로써 잡다한 현상의 가치를 격하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관념적으로 잡다의 세계를 떠나 무의 세계로 마음이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본무에 마음을 두면 헛된 생각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도안의 말은 이러한 생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卽色義(즉색의)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支遁(지둔)에게서도 나타난다.
지둔은 도안이나 축법심이 그러했던 것처럼 초월하여 나아가야 할 세계와 현상계를 존재론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한다. 이러한 사유는 그가 당시 유행하고 있던 郭象(곽상)류의 초월이론에 반대하여 제시한 초월이론에서도 볼 수 있다.
郭象(곽상)은 모든 존재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 逍遙(소요)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따로 초월해야 할 대상도 없고 초월해 나아가야 할 세계도 없다. 이것은 분명히 절대적인 현상 긍정의 존재론이며, 이 세계 밖의 다른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이론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기초는 만물의 獨化論(독화론)이다. 獨化(독화)란 모든 존재가 어떠한 발생론적인 본체나 형이상학적 본체를 가지지 않으면서 스스로 존재함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그 자체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차별적인 그대로가 바로 절대 긍정해야 할 상태이다.
따라서 차별성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거기에 맞게 사는 것이 곧 소요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요론을 전개하는 곽상류의 현학에서 이상적 인간으로 내세우고 있는 성인은 현상적인 모든 존재에 대하여 차별하는 마음이 없으며,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심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다.
2.불교의 이제론
 불교는 위진시대에 성립된 격의불교를 통하여 중국사상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격의불교의 이론가들은 공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般若部(반야부) 경전을 바탕으로, [공]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이론을 제출하였다.
이들은 모두 공을 無(무)와 같은 것으로 보면서 이론을 전개하였지만, 이 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六家七宗(육가칠종)으로 불리는 여러 가지 이론이 나타났다.
격의불교의 이론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으며, 현재까지 가장 많은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本無義(본무의)다. 본무의는 다시 道安(도안)의 본무의와 竺法深(축법심)의 本無異義(본무이의)로, 먼저 축법심은 본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무란 色法(색법)이 있기 이전에 먼저 無(무)가 있었다 (는 뜻이다). 그러므로 有(유)는 無(무)로부터 나왔다. 즉 무는 유의 앞에 있으며, 유는 무의 뒤에 있다. 그러므로 본무라 한다.
여기에서 축법심은 현상인 有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本體(본체)인 無(무)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무를 현상의 본체라는 의미에서 본무라 칭한다. 그렇다면 본체인 무는 어떠한 것인가? 이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無란 무엇인가 ? 텅 빈 듯하여 아무 모습이 없지만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 有는 생겨날 수는 있지만 만물을 생겨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佛陀(불타)가 梵志(범지)에게 말하기를 \'四大(사대)가 空(공)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축법심은 空을 無와 같은 것, 즉 현상의 발생론적 본체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왜 현상의 본체를 상정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有인 현상은 어디까지나 생겨난 산물일 뿐, 세계를 생겨나게 하는 能生(능생)의 본체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을 산출해내는 본체를 따로 상정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無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무는 어떠한 존재도 없다는 뜻의 절대무, 허무는 아니다. 그것은 차별적인 모습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無形(무형)이며, 한정적인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無名(무명)이라고 할 수 있는 무(無)다.
이것은 축법심이 무의 성격을 \'텅 빈 듯하여 아무 모습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지만,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고 한 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공을 현상의 발생론적 본체로 규정한 축법심은 眞俗二諦(진속이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만물의 본무는 텅 빈 듯하여 아무 형상이 없으니 第一義諦(제일의제)이고, (본무로부터) 생겨난 만물은 世諦(세제)라 이름한다.
진제는 곧 本無(본무)를 가리키는 것이고, 속제는 末有(말유)인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진제와 속제는 존재론적인 위상이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이다. 따라서 진제와 속제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지칭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각기 다른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안의 본무의는 다음과 같다.無(무)는 온갖 변화의 앞에 있으며, 空은 모습을 지닌 여러 사물의 始原(시원)이다. 무릇 사람들의 마음에 방해가 되는 것은 末有(말유)다. 만약에 마음을 본무에 둔다면 잘못된 생각들은 곧 그치게 된다. 도안의 이 이론은 무를 현상인 유의 앞에 놓는다는 점에서 축법심의 이론과 다르지 않다. 그의 경우에도 공은 무이고 현상의 본체이다. 그러나 吉藏(길장)은 도안의 이론이 밝히고자 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本性(본성)이 空寂(공적)하다\'는 것이라고 하여 축법심의 이론과 구별한다.
도안의 시대에는 本無(본무)와 實相(실상), 法性(법성)이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본성이 공적하다는 것은 법성이 공적하다는 것이며, 본무가 공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본무에는 잡다하며 생멸하는 현상적 존재들이 없다는 뜻이다. 본무와 법성에 관한 혜원(慧遠)의 말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인연(因緣)에 있는 것은, 本無(본무)에는 없다. (인연에 있는 것이) 본무에는 없기 때문에 본무라고 하는 것이다. 본무와 법성은 같은 내용이면서 이름만 다를 뿐이다.이 세계는 지둔이 말하는 초월의 세계고 여래의 세계며, 소요의 세계고 지인의 세계다. 이처럼 지둔이 지향하는 초월의 세계는 곽상과는 달리 현상계를 넘어선 곳에 있는 절대의 세계다. 이 점에서 그는 본무의 이론을 편 도안이나 축법심과 같은 입장에 선다.
\'모든 존재는 의탁하여 생겨나는 것이므로 으뜸이 없을 수가 없으며, 모든 일에는 말미암는 바가 있으므로 근본이 없는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은 그가 철저하게 왕필류의 본말이론에 입각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그가 직접 진속이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한 것은 없지만 결국 반야바라밀의 세계, 초월의 세계, 본무·지무의 세계가 곧 진제이며, 상대적인 차별의 세계, 유의 세계가 곧 속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분명히 서로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 것이다.

2.불교의 空觀


(空)이란 용어의 원어는 sunya로서 본래 ‘부풀어 오른’, ‘속이 텅 빈’, ‘공허한’ 등을 의미하여 ‘부풀어 오른 모양으로 속이 비어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sunya라는 말이 불교에 도입되어 공(空)으로 한역되고, 특히 <반야경>을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다루어진다. 이 공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취급하여 사상적인 관점에서 논의한 것을 공사상이라 하며 특히 대승불교에서 이러한 공사상을 강조한 사람들을 공론자(空論者)라 부르고, 그들의 주장을 공론(空論)이라 한다. 이러한 공론자는 용수 이후 중관파(中觀派)를 형성하여 공사상을 전개해 가며 그들은 스스로를 공성론자(空性論者)라 불렀다. 이것이 중국에 오면 구마라집의 제자 승조의 [현상이] \'유(有)\'라고 한다면, 그 유(有)는 \'본체론적 실재(眞生)\'라는 말이 아니다. [현상이] \'무(無)\'라고 한다면, 사물은 이미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생법으로서의 현상마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물의 형태마저 없지는 않기 때문에 \'비무(非無)\'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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