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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佛敎 신라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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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흥사 댓글 0건 조회 4,019회 작성일 20-02-2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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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대 불교 佛敎는 법흥왕에 의해서 크게 발전 하는 길이 개척 되었으나 불교 佛敎를 진흥시켜 불교 佛敎 국가로 손색이 없는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은 진흥왕에 힘입은 바 컸다.

554년 진흥왕 15년 흥륜사의 낙성과 더불어 왕은 국민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 하였다.

549년에는 양나라로 유학을 갔던 각덕 覺德이 최초로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 하였다.

550년 에는 불교 佛敎의 제반 업무를 관장 하는 행정 기구인 대서성 大書省과 소년서성 少年書省을 설치 하였다.

이듬해 에는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 승려 혜량을 승통 僧統 으로 삼고 그 밑에 비구승을 관장하는 대도유나 大都唯那 와 비구니 승을 관장하는 도유나랑 都唯那娘을 두게 함으로써 교단을 지도 육성하게 하고 통솔을 용이하게 하는 체제를 확립 하였다.

565년 진흥왕 26년 에는 진 나라의 문제 文帝가 승려 유사 劉思를 신라의 유학승 명관 明觀과 동행하게 하여 불교 佛敎 경론 2,700여 권을 전 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불교계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한 일 이다.

나날이 늘어 가는 한역 漢譯된 불교 佛敎 경전 중 중요한 문헌들이 곧 신라인 들의 불교 佛敎 이해를 돕게 된 것이며 이때 부터 신라에서는 본격 적인 불교 佛敎 연구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 전체 불교계를 위해 유사와 명관의 기여는 대단히 막중한 것이 었다.

또한 567년에는 14년의 공사 끝에 최대의 사찰 이었던 황룡사 皇龍寺를 비롯하여 기원사 祇園寺와 실제사 實際寺의 두 절을 세웠고 574년 에는 이 황룡사에 장륙 丈六의 불상을 안치 하였다.

이 장륙 불은 금동 불상으로 3만 5007근의 구리와 1만 198푼의 금이 들었으며 좌우의 두 보살은 철 1만 2000근과 금 1만 130푼이 들었다고 한다.

572년 진흥왕 33년 10월에는 팔관지법 八關之法과 인왕 백고좌회 仁王百高座會를 열어 신라 최초의 불교 佛敎 호국도량 護國道場을 개설 하였다.

승통 혜량의 지도 아래 7일 동안 베풀어진 팔관 지법은 이때 전몰 장병의 위령제로 시작 되었으나 뒤에 민족의 축제인 팔관재 八關齋로 바뀌게 되었다.

또 백고좌 회는 원래 100명의 고승을 모아 불경을 강 講 하는 모임이다.

이때에 설법을 할 만한 100명 고승이 이미 나타 났었는 지는 의문 이지만 혜량과 그 밖의 몇 사람이 주동이 되어 경전을 강하는 일종의 연구적 모임 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576년에는 고승 안홍 安弘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 하면서 불사리와 함께 능가경 楞伽經 승만경 勝鬘經등 완숙한 대승 경전을 가지고 오는 한편 인도로 부터 중앙 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인도승 비마라 毗摩羅 농가타 農伽陀 불타승가 佛陀僧伽 등과 함께 귀국 하였다.

이들은 공식 적으로 신라에 온 최초의 외국 승려이다.

왕은 이 해에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어 호를 법운 法雲 이라 하였으며 왕비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 永興寺에 살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진흥왕의 불교 佛敎 진흥책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국선 國仙과 화랑도 花郎徒의 창설 이다.

화랑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지만 역사 적인 자료를 통해서 정확하게 살펴 보면 신라 불교 佛敎 문화를 진흥 시킨 진흥왕이 불교 佛敎 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설치 하였던 청소년 수양 단체 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진흥왕이 나라를 흥하게 할 목적으로 불교 佛敎의 미륵사상 彌勒思想과 이상 국가 사상인 전륜성왕사상 轉輪聖王思想 등을 중심으로 해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체 에서는 신라의 미륵을 상징하는 국선이 모든 무리를 통솔하고, 그 아래에 각각 소단체의 우두 머리로 화랑이 있어서 자기 무리의 낭도 郎徒 들을 거느 렸다.

또 낭도에는 일반 소년 낭도 와는 달리 한 사람의 승려가 낭도로 있으면서 국선을 보좌 하였다.

이와 같은 화랑도의 불교 佛敎 적인 면을 뒷받침 하는 많은 사료 중에서 미륵선화 彌勒仙花 와 화랑 김유신 金庾信의 용화향도 龍華香徒 및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 銅輪太子 금륜왕자 金輪王子의 이름 등은 움직일 수 없는 대표적인 사실 史實의 예증 이다.

진흥왕의 뒤를 이은 역대 왕들도 그를 본받아 불교 佛敎 문화를 진흥 시켜서 훌륭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신라 불교 佛敎를 더욱 꽃피우게 되었다.

진흥왕의 뒤를 이은 진지왕 금륜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서 태자 동륜이 일찍 죽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폐위되자 동륜의 아들 진평왕이 579년에 즉위 하였다.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 白淨 으로서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백정왕 白淨王 일명 정반욍 淨飯王에서 취한 것이고 왕비도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을 그대로 취하여 마야부인摩耶夫人 이라 하였다.

또한 진평왕의 아우 백반 伯飯과 국반 國飯 등도 인도 백정왕의 아우였던 백반왕 등의 이름에서 취한 것으로서 이때의 왕실은 석가족의 왕명들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이러한 것은 왕즉불 王卽佛의 사상을 표시한 것으로 그 뒤를 이은 선덕 여왕의 이름 덕만 德曼과 다시 그 뒤를 이은 진덕 여왕의 이름 승만 勝鬘도 다같이 불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

특히 승만은 승만경의 여 주인공 승만 부인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이 진평왕 때에는 원광 圓光 담육 지명 智命 등의 고승들이 활동 하였던 시기 이다.

지명은 585년 진평왕 7년에 진나라로 가서 18년 동안 공부한 뒤 귀국한 고승으로 무엇 보다도 계행 戒行이 깨끗 하기로 유명 하였다.

진평왕은 그에게 대사 大師 대덕 大德을 나중에는 대종사 大宗師의 계위를 주어 존경 하였다.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들어가 유학을 하고 605년에 귀국한 담육 지명과 견줄 만한 이 시대의 고승 이었으나 그가 어떤 분야에서 활약 하였는 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이 시대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고승은 원광 이다.

그는 589년 진평왕 11년 중국에 가서 불법을 깊이 공부하고 교화 활동 등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600년에 신라로 돌아 왔다.

그가 남긴 큰 업적은 첫째, 대승의 경교 經敎를 강설하여 대승의 법문을 펴고 크게 교화 하였다.

둘째,  불교 佛敎의 국가적 적응성을 보여 주었다.

그는 608년에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수나라에 청병 請兵 하는 글인 걸사표 乞師表를 써 달라고 왕이 부탁 하였을 때 승려로서 자기 나라를 이익 되게 하기 위해 남의 나라를 멸망시켜 달라는 글을 쓸 수가 없지만 신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백성의 도리로서 왕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걸사표를 써 주었다.

셋째,  세속오계 世俗五戒를 설한 점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싸움터에 나가면 물러서지 말아야 하며,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이 세속오계는, 평생의 교훈이 될 만한 가르침을 청하는 귀산 貴山과 취항 箒項에게 세속인 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일러 주어 백성의 도리를 다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원광이 새로 제정한 것도 아니며 불경에 있는 말 그대로도 아니다.

그때 까지의 신라 사람들에게 오래 내려 오던 미덕들을 원광이 덕목화 德目化 하여 평생을 지킬 교훈으로 삼게 한 것이다.

그의 장례는 국장 國葬으로 베풀어 졌고 왕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진평왕 이후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기 까지인 632~668년 36년 동안에는 선덕여왕 진덕 여왕의 두 여왕과 태종 무열왕의 치세가 전개 되었고 마지막 으로 문무왕이 그 통일의 위업을 달성 하였다.

선덕과 진덕의 두 왕은 여왕 이었으나 그 속명 俗名 까지도 인도 불교 佛敎의 경전 속에 나오는 성녀인 聖女人 의 이름을 본떠서 지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독신자 였다.

선덕여왕 때에 서라벌 에는 분황사 芬皇寺 634년 영묘사 靈妙寺 635년 및 황룡사의 9층탑이 조성 되었고 태종 무열왕 때에는 한산주 漢山州에 장의사 壯義寺 659년 가 창건 되었다.

그 밖에도 금곡사 金谷寺 법류사 法流寺 원녕사 元寧寺 통도사 通度寺 수다사 水多寺 석남원 石南院 압유사 鴨遊寺 실제사 實際寺 등의 이름이 사기 史記에 나타나 있다.

또한 664년 문무왕 4년 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불사 佛寺에 재화 財貨 와 토전 土田을 보시하는 것을 금할 정도 였으므로 이 시기의 신라 불교 佛敎는 백성들 사이에 보편화 되어 있었고 매우 융성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승려의 수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 된다.

634년 선덕여왕 5년 에는 왕이 병으로 오래 누워 있었는데 그때에 백고좌 법회를 황룡사에서 열고 인왕경을 강하게 하였으며 승려 100명을 득도하게 하였다.

또 선덕여왕 재위기간 에는 승려 들이 중국으로 유학가는 일이 많았다.

이들은 귀국하여 신라 불교 佛敎의 전성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원효와 명랑 明朗과 자장 慈藏이 당나라로 부터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크게 활약한 것도 이 무렵 이었다.

또 당나라로 건너 갔다가 다시 인도에 까지 가서 구법 求法을 한 승려들도 상당수에 달 하였다.

인도의 나란타사 那蘭陀寺에 머물면서 많은 불경을 읽고 깊이 연구 하였으며 본국으로 돌아 오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70여 세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리 야발마 阿離耶跋摩를 비롯하여 혜업 慧業 현태 玄泰 구본 求本 현각 玄恪 혜륜 惠輪 현유 玄遊 및 두 명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승려 등이 선덕여왕 때에 인도로 갔다고 전 한다.

특히 중국에서 교화 활동을 하여 크게 명성을 떨친 뒤 귀국한 자장의 활동은 신라 불교 佛敎를 재정비 하고 발전 시키는 데 크게 기여 하였다.

그의 중요한 업적은 첫째, 643년 선덕여왕 12년에 귀국 하면서 부처님의 바리 鉢盂와 가사 袈裟 사리 舍利와 불경 400여 상자 번 幡 당 幢 화개 花蓋 등 법당을 장엄하게 꾸미는 물품을 가지고 와서 신라에 새로운 불교 佛敎 문화를 도입한 것이다.

둘째, 귀국한 뒤 대국통 大國統 이 된 그는 국내의 교단을 정비하고 승단 僧團의 기풍을 쇄신 하였다.

특히 보름마다 열리는 포살 布薩을 엄격히 시행하고 겨울과 봄에 두 차례의 시험을 치러 잘못을 범함이 없도록 하였으며 순사 巡使를 보내어 지방 사찰을 돌아보게 하는 한편 불교 佛敎 의식을 장중하고 엄하게 지내도록 함으로써 정법 正法을 지키고 보호 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불교 佛敎의 일대 번영을 초래케 하였다.

셋째,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 경론을 강하고 통도사에 금강계단 金剛戒壇을 만들어 계법 戒法을 널리 폄으로써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 佛敎를 신봉하는 터전을 마련 하였다.

넷째, 호법 護法 및 호국의 불사 佛事를 크게 일으 켰다.

불법을 신봉하고 널리 펴기 위한 호법의 불사로서 자장은 양산의 통도사와 오대산 상원사 수다사 태백산 석남원 원녕사 태화사 太和寺등 많은 절을 세웠다.

특히 오대산을 문수 도량으로 설정하여 불국토 신앙 佛國土信仰의 대중화를 꾀 하였다.

호국의 불사 중 대표적인 것은 왕에게 청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건립한 일이다.

그는 신라를 둘러싼 9개국의 침략을 막아 삼국을 통일하고 신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상징으로 높이 225척의 이 탑을 건립 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일반 대중들의 생활 속에 뛰어 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 佛敎를 골고루 전파한 선각자 적인 고승들이 많이 나타 났다.

그 대표 적인 고승으로 혜숙 惠宿과 혜공 惠空 그리고 대안 大安을 들 수 있다.

혜숙은 승려 이면서도 일찍이 국선의 낭도로 있다가 안강의 적선촌 赤善村에 살면서 왕도 중심의 귀족 적인 불교 佛敎의 범주를 벗어나서 시골 사람들 에게 불법을 알리고 서민을 교화.하였다.

혜공은 본래 미천한 태생 이었으나 어려서 부터 신이한 행동이 많아 주인인 귀족으로 부터 성인의 대우를 받았으며 출가한 뒤에는 혜공이라 이름 하였다.

그는 당시 승려들 과는 달리 귀족 적인 위치와 웅장한 절을 버리고 이름없는 작은 절에 살면서 매일 마을의 골목 거리를 다니면서 대중을 교화 하였다.

허름한 옷에 삼태기를 등에 지고는 초부 목동이나 뒷 골목의 건달 술주정 꾼들이나 가난한 서민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가까이 하였다.

서민 교화의 선구자 였을 뿐 아니라 학덕도 당대에 뛰어난 고승으로 일찍이 원효가 저술을 할 때 언제나 혜공을 찾아 물었다고 하며 옷이 물에 젖지 않는 등 서민들 사이에 깊이 파고 들 수 있었던 이행 異行이 많았던 고승 이었다.

또한 본래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대안은 항상 특이한 모습으로 장터 거리에서 살았다.

언제나 동발 銅鉢을 마주 치며 대안 대안 大安 大安을 외치고 돌아 다니면서 서민을 교화 하였으므로 대안성자 大安聖者 라고 불렀다.

대안과 원효는 스승과 제자 처럼 지낸 사이 였다.

이 시대의 불교 佛敎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삼국 통일의 주축이 되었던 화랑도 와의 관계 이다.

그때의 화랑도 속에는 승려 들이 속해 있어 그들의 정신적 교육을 담당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가 하기도 하였으며 화랑 출신의 장군들은 그 신앙에 의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다.

화랑도 들과 함께 있었던 실제사의 승려 도옥 道玉은 655년 태종무열왕 2년 백제와 싸움에서 화랑 김흠운 金欽運이 전사하자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내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건대 위로는 술업 術業 수행을 잘 익혀서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고 다음으로 도용 道用 포교을 일으켜서 남을 이익되게 하라 하였으나 내가 상문 桑門 승려의 용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선 善도 취할 수 없다.

차라리 종군하여 살신 殺身 함으로써 보국 報國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리고는 승복을 군복으로 갈아 입은 뒤 이름을 취도 驟徒로 바꾸고 적진으로 돌진을 하여 힘껏 싸우다가 전사 하였다.

659년에는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워 전사한 화랑들의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또한 15세에 화랑이 되었던 김유신은 그와 함께 하는 무리들을 용화 향도라 하여 불교 佛敎 정신에 입각한 새 시대의 주인공 들을 길렀을 뿐 아니라 전쟁 중에도 깊은 신심 信心을 잃지 않았다.

661년 고구려와 말갈의 합병 군이 신라의 북한 산성을 포위 공격하여 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다랐을 때 김유신은 사람의 힘이 이미 다 하였다.

강조 降助 신이 내려와 도와 줌를 얻을수 밖에 없다 하고 불사 佛寺에 이르러 단을 만들고 기도를 올렸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진으로 떨어 지며 우뢰와 비가 하늘과 땅을 진동 하였고 고구려 병사 들은 포위망을 풀고 달아 났다고 한다.

또 김유신이 왕명을 받들어 당나라 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쳐들어 갈때 현고잠 縣鼓岑의 수사 岫寺에 이르자 며칠 동안 행군을 멈추고 재계 齋戒하고 정성껏 불공을 올린 뒤 행군을 계속 하였다.

그는 대승 불교의 보살 정신을 그대로 소유한 전형적인 화랑 이었다.

통일 전야의 신라에는 밀교 密敎가 들어와서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632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635년에 귀국한 명랑 明郞은 밀교를 최초로 신라에 들여온 승려 이다.

통일 후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 하려는 기세가 엿보일 때 명랑은 밀교의 비법을 써서 당나라 군사를 무찔렀고 신라 신인종 神印宗의 종조 宗祖가 되었다.

많은 고승들과 왕실 중심으로 한 재가 신자들의 노력으로 신라적 불교 佛敎 토착화가 이루어 졌고 통일 후 불교의 황금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 하였다.

통일 신라기의 불교 佛敎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 왕조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거의 250년간 계속 된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대체로 전 100년과 후 150년으로 구분되는 두 기간 동안에 각각 다른 특징을 보인다.

전기는 불교 佛敎 사상이 건전하게 발전한 시기이고 후기는 그 전기 불교 佛敎가 차차 퇴락 쇠퇴 하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불교 佛敎가 일기 시작한 시기 이다.

민족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 통일 하였으면 서도 그들의 좋은 점을 받아 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불교 佛敎 역시 안정된 환경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佛敎 문화까지 더 보태어 내면적인 심화를 가져 왔다.

이러한 결과가 있기 까지는 훌륭한 고승들의 배출과 그들의 끊임없는 교학적 연구 교화 활동이 있었기 때문 이다.

통일신라 전기에 활동한 대표적 고승으로는 원효 원측 의상 경흥 憬興 의적 義寂 도증 道證 승장 勝莊 둔륜 遁倫 태현 太賢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저술을 보면 대체로 불경으로는 대반야 바라밀경 금강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대무량수경 아미타경 열반경 미륵경 금광명경 범망경 논 論 으로는 광백론 廣百論 유가론 瑜伽論 유식론 唯識論 아비담잡집론 阿毘曇雜集論 인명론 因明論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 등에 관한 연구 주석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불교 佛敎 역사상 경론 經論에 대한 주소 註疏가 가장 활발 했던 시기 였으며 교학 연구도 이때의 산물 이라는 것은 역사를 논하고 평가함에 있어 시사를 주는 것이다.

이 시대의 불교 佛敎는 철학 적으로 화엄경의 일승원융 사상 一乘圓融思想을 기초로 하고 그것을 뒷받침 하는 이론 으로는 반야경 특히 반야 이취경 般若理趣經과 금강 반야경을 중요시 하였으며 인명 因明 유식 唯識 유가 瑜伽의 이론을 응용 하였다.

또한 법화경과 열반경은 가장 대승 적인 경전 으로서 이 시기의 모든 불교 佛敎 사상가 들이 한결 같이 중시 하였다.

또한 신앙 면에서 미륵삼부경 彌勒三部經 무량수경 아미타경 약사경 藥師經을 중요하게 여겨 대중 교화의 방편으로 삼 았다.

또한 국가 안태를 위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유행한 금광명 최승 왕경과 인왕 반야경이 매우 중시 되었으며 여러 차례 백고좌 강회나 팔관회 에서 강설 되었다.

이렇듯 이 시기는 한국 불교 佛敎 역사상 불교 佛敎의 참뜻이 가장 원만히 드러 났으며 불교 佛敎의 구체적 기능이 충분히 발휘 되었고 이론과 실행 면에서도 원만한 융화가 이루어져 독특한 한국 불교 佛敎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는 민족적 불교 문화의 완성에 주축이 되었던 많은 고승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 적인 인물은 원효와 의상 이다.

원효는 한국 불교 佛敎 최고의 고승 이다.

그는 한국의 불교 佛敎를 정리 하여 사상 적으로 토착화 시킨 이론의 천재일 뿐 아니라 불교 佛敎 정신을 실천 적으로 발휘하게 한 위대한 교육자 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 求法 할 뜻을 품고 의상과 함께 육로로 당나라를 향해 갔으나 고구려에서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 왔다.

10년이 지난 뒤 백제가 망하여 바닷 길이 열리자 다시 당을 향해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되돌아 왔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 난다.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 간들 있겠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하고 유학의 길을 포기한 원효는 국내에서 더욱 불교 佛敎의 증진을 위해 노력 하였다.

그는 불교 佛敎의 참뜻을 알리고 불교 佛敎의 혜택을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입히기 위하여 교화를 위한 실천의 길에 나섰다.

모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거사 居士의 차림으로 손에는 무애 無碍의 표주박 을 쥐고 노래와 춤을 추며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면서 불교 佛敎의 대중화에 힘 썼다.

당시 신라 사회의 잘못을 지적하여 올바른 진로를 가르쳐 보여 주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실상 實相 의 의미를 깨닫도록 깊은 세계관과 인생관을 제시해 준 고승 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뜻은 저술을 통해서도 널리 반영 되었다.

그의 저서는 85종 180여 권에 이르며 현재에도 20여 종이 남아 있다.

그 중 대승 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 및 기신론 별기 起信論別記는 현대에 까지 그 참신성을 드러내는 올바른 인생관을 담고 있으며 금강 삼매경논 金剛三昧經論은 진정한 평화와 통일과 자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하여 얻어질 수 있는가를 갈파한 신비적 체험의 책 이다.

또한 대승 경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유마경 반야경 해심밀경 대지도론 유식론 보성론 섭대승론 등에 대한 종요 宗要 와 소 疏 를 지어 방대한 불교 佛敎 철학의 진수를 드러 냄 으로써 불교 佛敎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길잡이가 되게끔 하였다.

그는 승려인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 였고 초인적인 저술가 였으며 뛰어난 실천가 였다.

의상은 661년 문무왕 1년에 당 나라 종남산 지상사 至相寺에 있는 화엄종의 지엄을 찾아가서 화엄경을 연구한 뒤 중국에서 화엄을 강하여 크게 이름을 떨 쳤다.

그러나 당 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671년에 귀국하여 국가의 위기를 구 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온 나라에 화엄 불교 佛敎를 널리 펴기 위하여 태백산에 부석사 浮石寺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교화 함으로써 해동 화엄 초조 海東華嚴初祖가 되었다.

그리고 지리산 화엄사 華嚴寺 가야산 해인사 海印寺 금정산 범어사 梵魚寺 등지 에서도 화엄의 도리를 전법 하였다.

또한 그는 낙산사 洛山寺에 신라 관음 신앙의 터전을 열었으며 오진 悟眞 지통 智通 표훈 表訓 진정 眞定 진장 眞藏 도융 道融 양원 良圓 상원 相源 능인 能仁 의적 義寂 등 10명의 수제자 와 3,000명의 문도를 길러 한국 불교 佛敎의 사상과 신앙에서 가장 큰 맥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는 화엄 사상과 관음 신앙을 정착 시켰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화엄일승 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가 전 한다.

이들 2대 고승 외에도 통일 직후의 신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불교 佛敎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신문왕 때 국로 國老를 지냈던 경흥 憬興은 학덕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으며 삼장 三藏을 통달한 고승으로서 미륵 삼부경소 를 비롯한 40여 부 250권의 저술을 남겨 신라 3대 저술가의 한 사람으로 손 꼽 힌다.

또한 신문왕 대의 고승으로는 승전 勝詮과 도징 道澄 점개 漸開 등이 있다.

692년 신문왕 12년에 귀국한 승전은 당 나라의 법장이 새로 지은 화엄경 탐현기 華嚴經探玄記 등 5종의 책을 가지고 와서 의상에게 전 하였고 스스로 화엄을 강하면서 심원장 心源章을 지었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도징 또한 당 나라로 부터 귀국 하면서 천문도 天文圖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친 일이 있다.

점개는 흥륜사 에서 점찰선악 업보경 占察善惡業報經에 의거하여 잘못을 참회하고 업장을 없애고자 하는 예식인 육륜회 六輪會를 베풀기 위해 시주를 권하며 다니기도 하였다.

이 밖에 혜통은 당 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밀교로써 크게 교화 하였으며 그의 가풍은 전승되어 후대에 진언종 眞言宗의 근거가 되었다.

이때의 신라 불교 佛敎계의 주류는 원효 의상 자장이 닦아 놓은 사상이 그대로 흐르고 있었고 밀본 密本 명랑 혜통을 중심으로 한 밀교의 한 줄기가 병행하고 있던 시기 였다.

이 시기에 가장 존숭을 받은 불보살은 석가모니 불을 비롯한 아미타불 미륵불 약사여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이었다.

성덕왕 때에는 태종 무열왕을 위해 봉덕사 奉德寺를 세우고 인왕 도량을 열었다.

호국인왕 반야경 護國仁王般若經을 근거로 나라와 백성의 안락과 번영을 기원하는 이 도량이 기록화 되기는 이때가 처음 이다.

또한 704년 김사양 金思讓에 의해 금광명 최승왕경 金光明最勝王經이 당 나라로 부터 들어 오게 됨에 따라 금광명 도량을 개설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 었다.

또 이 시기에는 저마다 조상의 영 靈을 위하여 조상 造像하는 습관이 크게 유행되기 시작 하였다.

현존 하는 감산사 甘山寺의 미륵 존상과 미타 존상은 성덕왕 때 중아찬 重阿飡의 벼슬에 있던 김지성 金志誠이 세상을 떠난 부모와 전처 등을 위해서 만든 것으로 이러한 경향은 차차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불국사 佛國寺와 석불사 石佛寺 등이 김대성 金大城에 의해 이루어 진다.

경덕왕은 그 이전 50년 동안에 다스린 다른 왕들에 비하면 훨씬 탁월하게 불교 佛敎를 발전 적으로 이끌어 간 지도자 였다.

그는 745년에 우금리 禹金里 의 한 가난한 여인이 민장사 敏藏寺의 관음상 앞에서 7일 동안 기도를 드렸더니 전쟁 에서 행방 불명 되었던 아들 장춘 長春이 되돌아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절에 많은 토지와 재물을 시주 하였다.

장춘이 살아서 돌아오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신라인 들에게 있어 나라를 그리는 마음이 불보살을 섬기는 마음과 완전히 일치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 신라 불교 佛敎가 완전히 민족 사상 또는 민족 신앙으로 토착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왕은 이듬해 4월 대사령 大赦令을 내려 관용을 베풀고 150명에 달하는 많은 승려를 출가 시킴으로써 중국의 양무제 梁武帝 이래로 신심 깊은 왕이 취하는 경건한 참회의 행위를 본 받았다.

753년 여름에는 가뭄이 매우 심하여 이를 걱정한 왕이 태현 太賢을 궁중으로 불러 기우 祈雨를 하도록 하였는데 태현은 금광명경을 강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이것이 금광명경을 강설한 최초의 기록 이다.

754년에는 왕이 법해 法海를 불러 황룡사 에서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친히 행차하여 분향 하였다.

이 해에는 황룡사의 범종이 주조 되었으며 755년에는 분황사에 약사 여래상을 모셨다.

이는 문헌상 약사 여래에 관하여 언급한 최초의 기록 이다.

약사여래 신앙은 약사경을 근거로 하여 생긴 신앙으로서 약사 여래는 사천왕 四天王과 팔부신중 八部神衆 및 십이지신 十二支神을 권속으로 삼고 있는데 그를 지극한 마음으로 칭명 염송 稱名念誦 하는 이에게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 등을 물리치게 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존재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각처 에서는 약사 여래와 그 권속들을 새긴 동불 銅佛 석불 석탑 벽화 등이 많이 나타나고 이에 대한 신앙이 점차 증대하여 갔다.

또한 이 당시의 신앙 형태는 특정한 한 부처나 보살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으므로 여러 불보살을 한꺼번에 믿고 섬기는 경우도 많았다.

같은 무렵 강주 康州 진주 에서는 신도 수십 명이 미타사 彌陀寺를 창건하여 만일 萬日을 염불 수행 하기로 하고 계 契를 맺기도 하였다.

때로는 아미타 불을 때로는 약사 여래나 미륵이나 지장보살을 그리고 때로는 관음 보살을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 신앙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신앙풍조 였다.

그와 함께 약사여래 미륵 불 아미타 불 석가모니 불을 사방불 四方佛로 생각하고 신봉하는 사방불 신앙도 생겨 났다.

그러나 사방 불이 반드시 부처만이 아니라 보살을 포함할 경우도 있었다.

왕자였던 보천 寶川과 효명 孝明이 오대산에 보천암 寶川庵 을 세우고 수행할 때 체험한 오만진신 五萬眞身 중 4대 四臺의 주존 主尊은 동서 남북을 좇아 관세음 보살 아미타불 지장 보살 석가모니 불의 순으로 열거되고 있다.

경덕왕 때의 불교 佛敎 관계 기록은 교학연구 보다는 불 보살에 대한 신앙에 얽힌 영험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차츰 불교 佛敎가 타력 신앙의 경향을 띠고 있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경주 한기리에 사는 희명 希明 이라는 여인은 분황사의 천수관음 千手觀音에게 빌어 장님 아이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다.

아간 귀진 貴珍의 집 종인 욱면 郁面은 미타사에서 열심히 염불하여 서방 정토에 왕생 하였다.

포천산 布川山의 다섯 비구는 아미타 불을 염불하고 서방 정토를 구한 지 몇 십년 만에 홀연히 성중 聖衆이 서쪽으로 부터 와서 맞이 하였다는 것도 이때의 일 이다.

또 758년에는 김대성이 발원해서 시작한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 공사가 끝나 신림 神琳과 표훈 表訓을 주지로 삼았다.

이 두 절의 정묘한 예술성은 종교적 신심의 외적 표현으로 그 조각이 지니는 고도의 정신성은 당시 신라 불교 佛敎가 발휘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산물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758년에는 큰 번개가 일어나 절 16개 소에 진동이 있었고 760년에 해가 둘이 나타나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왕이 월명 月明에게 이를 해결해 줄 것을 청하자 월명은 도솔가 兜率歌를 지어 이를 쫓아 버렸다고 한다.

이 도솔가의 내용은 미륵불에 대한 찬탄의 노래 이며 그가 지은 제망매가 祭亡妹歌 는 절실한 미타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데 문학 적으로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 뛰어난 작품 이다.

또 월명과 함께 향가 문학 개발의 선구자가 되었던 충담 忠談도 이때의 승려로서 안민가 安民歌 와 찬기파랑가 讚耆婆郎歌를 남겼다.

이 중 안민가는 경덕왕의 청에 의해 지은 것으로 선정 善政을 찬양하고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충담은 3월 3일 과 9월 9일에 차 茶를 달여 남산 삼화령 三花嶺의 미륵 세존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태현 太賢과 진표 眞表가 있다.

성유식론학기 成唯識論學記 등 52부 120여 권을 저술하여 원효 경흥 등과 함께 3대 저술가 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태현은 특히 유식학 唯識學에 뛰어난 대가로서 중국 학자들 까지도 그의 학설을 안목 眼目으로 삼았다 한다.

일찍이 출가한 진표는 참회  정진으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 부터 참회 법과 점찰간자 占察簡子를 전해 받고 새로운 참회 불교 佛敎인 점찰교법 占察敎法을 크게 일으켜서 널리 국민을 교화 하였다.

진표의 이와 같은 교화 활동은 이전까지 있었던 신라 불교 佛敎인 들의 교화 활동과는 다른 특이한 것이 었다.

그는 영심 永深 보종 寶宗 신방 信芳 체진 體珍 등 훌륭한 제자 들을 길렀으며 금산사 金山寺 길상사 吉祥寺 지금의 法住寺 등을 창건하고 교법을 크게 떨 쳤다.

이 시대에는 많은 대덕들이 저술과 교화 활동 등으로 크게 활약 하였고 뛰어난 불교 佛敎 예술가 와 기술자 들이 많이 배출되어 당시의 불교 佛敎 문화를 찬연히 빛나게 하였다.

8세기 후반과 9세기에 걸친 불교 佛敎는 전통적인 교종의 발전이 그 한계점에 도달하여 점차 그 모순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선사들의 분주한 중국 내왕으로 구산선문 九山禪門 의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 였다.

혜공왕대 이후의 불교 佛敎 교단은 차츰 침체 되어서 불교 佛敎 인들의 활동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형편 이었다.

불교 佛敎가 침체된 가장 큰 원인은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에 있었다.

삼국 통일 이후 민족 대통합의 벅찬 과업을 성취하여 민족 문화 창조의 힘찬 저력을 보여 주었던 신라 왕조 였으나 혜공왕 대에 이르러 지금 까지의 안정과 전통이 흔들리기 시작 하였다.

왕좌의 쟁탈전이 잦아 지면서 정치는 혼란해 졌고 조정은 안정을 잃어 정치가 혼란해 짐에 따라 불교 佛敎도 그 활기를 잃어 갔다.

전쟁과 암투로 위정자 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면서 국가는 어지러워 지고 백성들 또한 갈팡 질팡 헤매게 되었으며 신라는 이미 국가 적으로 정도 正道를 간직하고 기릴 능력을 잃고 있었다.

따라서 창조 적이고 선도 적이며 활력에 차 있던 불교 佛敎 문화 활동은 그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또한 뜻 있는 불교 佛敎 인들은 혼란을 피해서 산 속 조용한 곳을 찾아 은둔 생활을 하거나 해외로 떠나는 이도 있었다.

결과 적으로 교단은 크게 위축되고 불교 佛敎 문화는 침체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불교 佛敎는 그 순수성이 퇴색되고 주술적 신앙과 어우러져 있었다.

불교 佛敎인지 무속 巫俗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탁 해져 있었음이 여러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분황사 우물에 있는 용 龍 세 마리를 당 나라 사신이 저주 하여 작은 고기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김현 金現과 호녀 虎女 의 만남이 얽힌 호원사 虎願寺 이야기 헌강왕 때 동해 용왕의 한 아들인 처용 處容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재앙의 귀신을 쫓았고 용을 위해 망해사 望海寺를 세웠으며 왕이 포석정에 행차 하였을 때 남산의 귀신이 임금의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 등은 귀신들과 관련된 설화 이다.

그리고 진성여왕 때에 거타지 居陁知 라는 사람이 용왕의 자손 으로서 간을 빼 먹는 늙은 중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 다라니 陀羅尼 모양으로 은어 隱語를 만들어 진성 여왕과 그 유모의 비행을 풍자하는 이야기 등은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불교 佛敎계가 이미 그 순수성을 잃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몇 명의 고승들이 있어 불교 佛敎계를 이끌어 갔다.

헌덕왕 때의 심지 心地는 진표 眞表의 점찰법 占察法을 계승하고 동화사 桐華寺에 참당 懺堂을 지어 대중을 교화 하였다.

원성왕 때에는 황룡사의 승려 지해 智海가 궁중에서 50일 동안 화엄경을 강독 하였다.

또한 799년에는 범수 梵修가 당나라로 갔다가 징관 澄觀의 신역후분 화엄경의소 新譯後分華嚴經義疏를 가지고 돌아 왔다.

802년 에는 순응 順應이 해인사의 중창을 시작 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이정 利貞이 완성 하였다.

806년 에는 사찰을 새로 짓는 것을 금지하고 다만 수리하는 것만을 허락 하였으며 사찰에서 사용하는 기구나 기타 복식에 금 은 비단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로써 당시 귀족 불교 佛敎의 사치가 얼마나 심하였는 가를 알 수 있다.

헌덕왕 때에는 이차돈의 넋을 기리는 법회가 그 기일 忌日 마다 베풀어 졌다.

법흥왕이 없이는 이차돈이 없고 이차돈이 없이는 신라 불교 佛敎가 없다는 뜻에서 영수선사 永秀禪師의 주관 아래 이 법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흥덕왕 때인 827년에 구덕 丘德은 당 나라에서 돌아 오면서 불경 약간 권을 가져 왔고 보요도 귀국하여 해룡왕사 海龍王寺를 창건 하였다.

당 나라에 갔던 진감국사 眞鑑國師는 830년에 귀국하여 쌍계사 雙磎寺를 중심으로 선법을 전파하고 지리산 일대에 차 茶 나무를 심어 다도 茶道를 보급 하였다.

이 처럼 많은 승려들이 당 나라를 내왕 하면서 새로운 불교 佛敎인 선 禪을 받아 들이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선풍진흥 禪風振興과 관계없이 신라는 갈수록 쇠퇴해 갔다.

경문왕 때의 사람으로 유교뿐 아니라 불교 佛敎 도교에 까지 통달 했던 최치원 崔致遠은 894년 가족을 거느리고 가야산으로 숨어 버린 뒤 모형 母兄인 현준 賢俊과 대사 정현 定玄의 도우 道友가 되어 산 속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신라의 멸망기인 효공왕 이후 경순왕에 이르는 기간 동안 불교 佛敎 사원에도 온통 불길한 징조만 나타난 것 처럼 기록이 되어 있다.

봉성사 奉聖寺의 회랑 21칸에 까치가 깃들이고 참포 斬浦의 물이 바닷물과 3일 동안이나 서로 싸웠다고 하며 또 영묘사 靈廟寺의 행랑에 까치와 까마귀 들이 다투어 집을 지었다.

경명왕 때에는 사천왕사 四天王寺 벽화 속의 개가 울었다고 하며 사천왕사 오방신 五方神 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튀어 나왔다가 들어 갔고 흥륜사에는 큰 불이 났다.

경애왕 때에는 황룡사가 요동하여 서쪽으로 기울어 졌다고도 한다.

그러한 가운데 935년 10월 마침내 왕은 고려에 항복하고 세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신라 왕조는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선 禪 불교 佛敎의 전래와 진흥 9세기에 접어 들면서 전래된 선불교 禪佛敎는 신라 불교 佛敎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러 일으 켰다.

선종은 이미 통일신라 초기에 중국의 달마선 達磨禪이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인 4조 도신 道信의 선이 신라승려 법랑 法朗에 의해서 전해진 바 있고 이어서 신수 神秀의 북종선 北宗禪이 신행 神行에 의해 전래 되었으나 크게 전파 되지는 못 하였다.

선이 신라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남종선 南宗禪을 중국의 지장으로 부터 전해 받은 도의 道義와 홍척 洪陟이 821년과 826년에 각각 귀국한 이후의 일 이다.

그 뒤 계속 당 나라에서 남종 선을 전수 받은 유학승 들이 귀국하여 선사찰 禪寺刹을 세웠고 선종 선포의 거점을 형성 하였다.

또한 885년 헌강왕 11년 에는 행적 行寂이 경저 慶諸의 선법을 받아 왔으며 효공왕 때에는 형철 逈徹 경유 慶猷 여엄 麗嚴 이엄 利嚴 등이 각각 조동종 曹洞宗의 선법을 가지고 돌아 왔다.

도의는 821년 귀국하여 남종선을 처음으로 신라에 전 하였으나 무념무심 無念無心 을 근본으로 하여 심인 心印을 전하는 그의 새로운 선풍 禪風은 경전 연구에 젖어 왔던 신라 불교 佛敎에 쉽사리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설악산 진전사 陳田寺로 은거하여 지냈다.

그 뒤 도의의 법을 이은 염거 廉居를 거쳐 체징 體澄이 840년에 귀국하여 가지산에 보림사 寶林寺를 세우고 도의의 종풍을 크게 떨침으로 써 가지산파 迦智山派를 이룩하게 되었다.

도의와 함께 수학 하였던 홍척은 826년에 귀국하여 지리산에서 선도 禪道를 창도 하였다.

그와 도의가 각각 남북에서 선도를 창도 하였으므로 이를 북산의 남악척 北山義南岳陟 이라고 일 컫는다.

홍척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여기서 선법을 선양 함으로써 실상산파 實相山派를 형성 하였다.

수백 명의 문도를 두었으며 흥덕왕과 태자 선강 宣康의 귀의는 지극 하였다.

이 실상산파는 신라에서 최초로 개산 開山된 선문이며 그의 제자 수철 秀澈이 2조가 되었다.

또한 일찍이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혜철 惠哲도 당 나라 지장의 심인을 얻고 839년에 돌아 와서 크게 선풍을 떨침으로써 태안사 泰安寺를 중심으로 동리산파 桐裏山派를 이루 었다.

그의 제자로는 도선 道詵과 여선 如禪 등이 있었다.

중국 지장의 심인을 이어 받은 가지산 실상산 동리산 등 3파가 호남에서 그 선풍을 떨치고 있을 때 호서 지방에서 보철 寶徹의 선을 이어받은 무염 無染이 성주산파 聖住山派를 개산 하였다.

당 나라에 있을 때 백낙천 白樂天과 각별한 도연 道緣도 맺고 동방보살 東方菩薩 이라는 별칭을 받기까지 했던 그는 845년에 귀국하여 성주사를 창건한 뒤 선풍을 크게 떨쳤다.

그는 무설토론 無舌土論 이라는 글을 지어 불교 佛敎와 조도 祖道 조사의 가르침 를 구별 하면서 불교 佛敎를 응기문 應機門 언설문 言說門 정예문 淨穢門으로 나누고 조도를 정전문 正傳門 무설문 無說門 부정 불예문 不淨不穢門 으로 나누어 선 禪과 교 敎 의 차이를 논 하였다.

한편 837년에는 현욱 玄昱이 당 나라로 부터 귀국하여 혜목산 고달사 高達寺에서 전법 하였는데 그의 선풍을 이어 받은 심희 審希가 봉림사를 창건하고 크게 선풍을 떨치게 되자 이를 봉림산파 鳳林山派 라고 하였다.

그의 법맥을 이은 자적 慈寂은 이 산문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다.

관동 지방에서는 사자산파 獅子山派의 선풍이 진작 되었다.

사자 산파는 847년에 중국 보원 普願의 선풍을 이어받고 귀국한 도윤 道允의 제자 절중 折中이 스승을 계승하여 개창한 것이다.

흥녕사 興寧寺에 중심을 둔 사자 산파는 종홍 宗弘 등에 의하여 계승 되었다.

도윤과 때를 같이하여 귀국한 범일 梵日은 강릉 굴산사에 자리를 잡고 40여 년간 교외별전 敎外別傳의 선풍을 진작 하였으며 그의 제자 개청 開淸이 사굴 산파를 형성 하였다.

순지 順之도 경문왕 때에 귀국하여 위앙종 潙仰宗의 선풍을 떨 쳤다.

위앙종 에서는 일원상 一圓相 을 그려 가면서 공부 하였는데 그 원상 圓相의 갈등 葛藤이 처음으로 순지에 의해서 신라 에서도 행해 지게 되었다.

그는 사대팔상 四對八相의 법과 삼편 성불론 三遍成佛論 을 제창 하였는데 삼편 성불은 증리성불 證理成佛 행만성불 行滿成佛 시현성불 示顯成佛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귀국한 대통 大通도 위앙종을 전파한 승려 이다.

또한 얼굴이 검기 때문에 흑두타 黑頭陀 라는 별칭을 얻었던 혜소 慧昭는 830년에 귀국한 뒤 지리산 쌍계사에 6조 혜능의 영당 影堂을 세우고 선법을 크게 떨 쳤으며 신라에 처음으로 어산범패 魚山梵唄 를 전하기도 하였다.

그의 법을 이어받은 도헌 道憲은 문경에 봉암사 鳳巖寺를 창건하고 희양산파 曦陽山派 를 개창 하였다.

이 밖에도 행적 行寂과 무착선사 無著禪師 홍각선사 弘覺禪師 등도 널리 선을 선양 하였다.

선불교는 교종의 전통 적인 권위에 대하여 반성을 가하는 동시에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 사고 방식에 맞설 만한 새로운 체질을 만드는 데 힘 쓰면서 고대 지성에 대응하는 중세 적인 지성으로 서의 선종을 모색 하였던 것이다.

신라 불교 佛敎의 해외 활동이 중국에서  신라 시대에 중국으로 유학한 신라 승려 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신라 불교 佛敎 문화에 공헌 하였으나 일부는 계속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의 학계나 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고승들이 있었다

그 대표 적인 인물은 원측 승장 勝莊 신방 神昉등 유식 학파의 승려들과 무상 無相 지장 地藏 등의 선사들을 들 수 있다.

신라의 왕손으로 일찍이 출가하여 중국으로 건너간 원측은 법상 法常과 승변 僧辨 등의 강학을 듣고 유식학의 연구에 힘 썼다.

그는 삼장 三藏의 교학은 물론 고금의 장소 章疏에도 통달 하였다.

당 태종의 명에 의하여 서명사 西明寺에 머물렀는데, 그의 계통을 서명학파 西明學派라 하였던 것도 이 때문 이다.

신라에서 그의 귀국을 청하였으나 측천무후 則天武后가 그를 매우 존경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제자 중 도증 道證 승장 勝莊 자선 慈善 등이 뛰어 났으며 도증과 승장은 신라  사람 이었다.

도증은 원측의 성유식론 강요 成唯識論綱要 등 무게 있는 저술을 남긴 뒤 697년에 귀국 하였는데 태현 太賢이 그의 제자 라고도 전하여 진다.

승장은 성유식론결 成唯識論訣 범망계본술기 梵網戒本述記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의정 義淨 등이 삼장을 역경 譯經 할 때는 증의 證義가 되기도 하였다.

신방도 일찍이 당 나라에 가서 현장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4인 중의 1인이 되어 대승방 大乘昉 이라고 불리 었다.

그리고 현장의 역경장 에서 증의의 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십륜경소 十輪經疏 성유식론 요집 등 적지않은 저서도 남 겼다.

선사들 가운데서 지덕 知德은 일찍이 5조 홍인의 11제자 중 1인으로서 이름을 날 렸다.
 
또 성덕왕의 3왕자 무상 無相 은 당 현종 玄宗의 지극한 예우를 받았으며 뒤에는 성도 成都에 들어가서 지선 智詵 과 그 제자 처적 處寂의 선풍을 이어 받아 정중사 靜衆寺 주지가 되었다.

그는 무억 無憶 무념 無念 막망 莫忘의 3구설 三句說을 천명하여 계 戒 와 정 定 에 구애하지 말고 보리 菩提를 증득 하는 데 근본이 되는 혜 慧를 잊지 말 것을 가르 쳤다.

무상과 때를 같이하여 성도에 있었던 김선사 金禪師도 당 현종이 대규모의 대성혜사 大聖慧寺 를 창건할 때 칙명으로 그 공역 公役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창건 후 주지로 임명 되기까지 하 였다.

경덕왕 때에 입당한 무루 無漏 는 8대탑 八大塔에 예배 하고자 인도로 가기 위해 파미르를 넘 었으나 도중에 되돌아 와서 성도에 자리를 잡았다.

이 밖에도 왕족 출신으로 지주의 화성사 化城寺에서 선풍을 크게 떨친 지장 地藏을 비롯하여 가지 迦智 충언 忠彦 각체 覺體 도균 道均 국청 國淸 청원 淸院 와룡 臥龍 서엄 瑞嚴 등이 있었다.

또한 당 나라에는 신라의 사찰이 있었다.

삼국통일 이후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 지면서 신라인 들은 산둥 반도나 장쑤성 江蘇省에 많이 살 았다.

이러한 신라인 들의 집단 거주지를 신라방 新羅坊 이라고 하였으며 신라인 들의 신앙 장소이자 정신적 의지처로 삼기 위해 창건한 절을 신라원 新羅院 이라고 하였다.

신라원은 서해를 항해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 하였던 곳이었을 뿐 아니라 본국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원 중에서 흥덕왕 때에 장보고 張保皐가 산둥 반도의 적산촌 赤山村에 세운 법화원 法華院은 가장 대표 적인 것이다.

이 법화원은 당으로 가는 신라의 유학승은 물론 일본 승려들 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사찰의 규모나 일상의식 연중 행사는 신라 본국과 같았다.

매년 8월 15일을 전후하여 3일 동안에 걸쳐 열렸던 축제는 성황을 이루었고 정기적인 강경회 講經會도 열었다.

여름에는 금광명경을 겨울에는 법화경을 강 하였던 강경회는 약 250여 명이 모여 2개월 동안 계속 하였다.

신라원 외에도 백낙천이 즐겨 찾았던 향로봉 香爐峯 대림사 大林寺에는 신라 승려만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볼 때 이러한 신라 사원이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 나라로 갔던 신라 승려 중 일부는 인도로 순례의 길에 올랐으나 모두들 신라 본국으로 돌아 오지는 못 하였다.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인도로 간 아리야 발마와 혜업은 불교 佛敎 학의 최고 전당인 나란타사 에서 불경을 연구 하다가 죽었다.

당 나라 승려 현조 玄照와 더불어 인도로 갔었던 현각 玄恪은 40세가 조금 지났을 때 죽었으며 현태 玄太는 서장 西藏을 거쳐 중인도로 가서 부다 가야의 보리수를 참배한 뒤 대각사에서 연구를 마치고 당 나라로 돌아 왔으나 그 뒤의 소식은 알 수 없다.

범어 梵語에 능숙 했던 혜륜 慧輪은 666년에 인도로 들어가 신자사 信者寺 에서 10년간 공부한 뒤 도화라 都貨羅 지방의 사원으로 옮겼다.

구법순례 중 수마트라 섬의 서해안에 있는 바로사 국에서 죽은 2인의 신라 유학승이 있었으나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인도 등지에서 생애를 마쳤지만 대범 大梵과 혜초 慧超는 인도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불교 佛敎 계에 공헌한 바가 컸다.

대범은 대각사에서 연구하고 돌아 왔으며 혜초는 벵골만의 니코바르 군도를 거쳐 인도로 들어 갔다.

일찍이 당 나라로 가서 인도승 금강지 金剛智의 제자가 되었던 혜초는 해로로 인도에 가서 모든 불적지를 순례한 뒤 다시 서역의 여러 나라를 돌아 보았고 중국으로 돌아 와서는 많은 교화 활동을 하였으나 끝내 신라에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인도 여행기 왕오 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지금도 그 상당 부분이 남아 있어 문화 교섭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경덕왕 대에 당 나라로 간 원표 元表는 인도로 가서 성적 聖蹟을 순례하고 당으로 돌아올 때 80권 화엄경을 가지고 와서 지제산 支提山 석실 石室 안에서 고행을 하였다.

통일 시대에 들어서 면서 신라승의 도일 渡日은 더욱 빈번해 졌고 이에 따라 일본에의 불교 佛敎 문물 전달도 많아 졌다.

687년 신문왕 7년에 왕자 김상림 金霜林이 불상과 바리 번 幡 등의 불구를 일본에 전한 것을 필두로 690년에는 전길 詮吉 등 50여명이 일본에 건너가서 전교 하였다.

고승 심상 審祥도 성덕왕 때 일본으로 가서 크게 교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740년에는 일본의 금종도량 金鐘道場 에서 화엄경을 개강하여 일본 국왕을 비롯한 승속 僧俗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지봉 智鳳은 일본에 법상종 法相宗을 전파 하였고 백제왕의 후예인 교키 行基는 도로를 닦고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 등의 복지 사업을 일으 켰으며 문수 보살의 화신 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752년 경덕왕 11년 에는 왕자 김태렴 金泰廉이 일본으로 가서 당시 일본 불교 佛敎의 중심지인 남부 도다이사 東大寺에 머물면서 불사 佛事를 크게 도왔다.

758년에는 승려 32명과 비구니 2명 남자 19명과 여자 21명이 일본으로 가서 무사시노 武藏野의 한지 閑地 에다 신라도 新羅都를 설치하고 교화에 힘 썼으며 816년에는 승려 26명이 건너 가서 일본 여러 절에 배치되어 불법을 폈다.

반면에 관상 觀常 운관 雲觀 등의 일본 승려가 신라로 유학 와서 신라의 불교 佛敎 문화를 수입하여 갔으며 신라명신 新羅明神을 호국 신으로 삼은 사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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