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佛敎 고려 초기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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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흥사 댓글 4건 조회 18,893회 작성일 20-02-26 18:13본문
삼국을 통일하여 강대한 국가를 형성했던 신라도 그 말기에 이르러 서는 정교 正敎 가 어지럽게 되었고 이러한 혼란기에 후백제와 태봉의 두 나라가 새로이 일어나서 다시 삼국이 병립하게 되었다.
태봉의 왕 궁예 弓裔는 불교 佛敎에 대한 믿음이 매우 두터운 사람 이었다.
그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 뒤에는 팔관회를 비롯한 많은 불교 佛敎 행사를 가졌으며 스스로를 미륵불 이라 하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 靑光菩薩 신광보살 神光菩薩.이라고 이름 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20여 권의 경을 지어 강설 하기도 하였다.
후백제의 왕 견훤 甄萱 역시 궁예에 못지 않은 불교 佛敎 신자 였다.
이와 같이 후 삼국은 모두 불교 佛敎를 숭상 하였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 王建도 불교 佛敎를 숭상하여 국가 적으로 크게 보호 장려 하였다.
태조는 불교 佛敎와의 인연이 매우 깊었던 사람이다.
그는 불교 佛敎를 크게 신봉 하였던 가정에서 태어 났으며 출생을 전후해서 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도선 道詵의 명성을 들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를 건설하고 후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 오직 불교 佛敎의 힘에 의해 서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태조의 태도와 신념은 결과 적으로 고려 전체의 불교 佛敎를 왕성하게 하고 또 국가의 종교를 불교 佛敎로 결정 지었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태조는 나라의 번영을 위해 더욱 불교옹호에 힘쓰는 한편 많은 사탑을 세우고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즉위년인 918년에는 팔관회를 열어 연례 행사로 삼았고 919년에는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뒤 성내에 법왕사 法王寺 자운사 慈雲寺 왕륜사 王輪寺 내제석원 內帝釋院 사나사 舍那寺 천선원 天禪院 신흥사 新興寺 문수사 文殊寺 원통사 圓通寺 지장사 地藏寺 등 열 개의 큰 사찰을 세웠으며 낡고 허물어진 사찰과 탑 등을 다시 고치도록 하였다.
921년에는 오관산에 대흥사 大興寺를 세우고 고승 이엄 利嚴을 맞아 들였고 922년에는 왕의 옛집을 헐고 광명사 廣明寺를 창건 하였으며 일월사 日月寺를 짓기도 하였다.
923년에는 사신이 중국에서 돌아 오면서 가져온 오백나한 화상 五百羅漢畫像을 해주의 숭산사 崇山寺에 안치 하였고 924년에는 외제석원 外帝釋院 구요당 九耀堂 신중원 神衆院 흥국사 興國寺 등을 창건 하였으며 927년에는 지묘사 智妙寺를 세웠다.
928년에는 중국에 갔던 홍경 洪慶이 돌아 오면서 대장경 大藏經 일부를 싣고 예성강에 이르렀을 때 친히 나아가서 맞이하여 제석원에 봉안 하였으며 929년에는 인도의 삼장 법사인 마후라 摩睺羅가 왔을 때도 위의를 갖추고 맞이하여 구산사 龜山寺에 있게 하였다.
930년에는 안화선원 安和禪院을 세워 선의 보급에 힘을 기울 였다.
938년에는 인도 마가다 국의 대법륜 보리사 大法輪菩提寺 의 밀교 계통 승려 홍범 弘梵 이 갈마단경 羯磨壇經을 가지고 고려로 옴으로써 고려 밀교 의식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 쳤다.
940년에는 천호산에 개태사 開泰寺를 창건하고 낙성 화엄 법회 落成華嚴法會를 열었을 때 왕이 친히 소문 疏文을 지었을 뿐 아니라 낡은 신흥사 新興寺를 수리하고 무차대회 無遮大會를 개설하여 연례적 행사로 삼게 하였으며 5왕자를 출가 시켰다.
943년 태조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친히 십조 十條의 훈요 訓要를 지어 다음 왕들의 본 보기가 되게 하였는데 1조에 불법을 신봉하고 불사를 일으킬 것을 강조 하였고 2조에는 도선이 정한 곳 이외에는 함부로 사찰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 왕조는 집권 초기부터 불교 佛敎를 중시 하여 외면상 불교 佛敎 국가를 형성 하였고 더 할수 없는 불교 佛敎 전성 시대를 이룩하게 되었지만 고려인 들이 부처에게 복을 비는 타력적 신앙과 지리 도참 신앙 쪽으로 치우치게 된 것도 이미 태조 때 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한 태조는 일찍부터 경유 慶猷와 충담 忠湛 등을 왕사로 삼고 현휘 玄暉를 국사로 삼았으며 이엄 여엄 윤다 允多 경보 慶甫 희랑 希郎 등 많은 고승들을 우대 하였다.
또 그는 신라가 9층탑을 세워 삼국을 통일한 옛일을 본 받아서 개성에는 7층탑 평양에 9층탑을 세워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였고 무려 500개에 달하는 사찰과 총림 叢林 선원 禪院 불상 탑 등을 3,500여 개나 세웠다.
태조 때의 선승 중 이엄은 태조의 부름을 받고 사나 내원으로 나와 왕사가 되었고 경보는 고려에 조동종을 전하였으며 긍양은 924년에 귀국하여 태조 혜종 정종 광종 등 4대에 걸친 왕의 자문에 응 하였다.
또한 현휘는 924년에 국사가 되었고 여엄은 역시 조동종의 선풍을 일으킨 승려 였으며 찬유는 경주를 중심으로 선림 禪林을 일으 켰는데 광종으로 부터 국사가 될 것을 종용 받기도 하였다.
동리산파 출신인 윤다는 태조의 빈례 賓禮를 받았고 충담은 당 나라에서 율 律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태조 때의 불교 佛敎는 왕 자신의 열렬한 불교 佛敎 존숭에 따라 크게 성황을 이루었으며 특히 선문의 팽창은 두드러진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라 말 부터 일기 시작한 선종 계통의 많은 선승들은 태조의 적극 적인 후원으로 고려의 지배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하면서 크게 활동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당시의 새로운 불교 佛敎의 한 계통인 선종에만 유의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 불교 佛敎 교종에도 관심을 기울여 불교 佛敎계의 조화를 도모 하였다.
전통적 불교 佛敎 의식의 부활이나 교종 사원의 개축 건립 등이 그것 이었다.
그러나 전통 불교인 교종과 혁신 불교 佛敎 선종의 대립은 종식될 수 없었고 그 사상적 과제를 해결하게 된 시기는 4대 광종 때에 이르러서 였다.
태조의 숭불호법 崇佛護法의 정신은 그 뒤를 이은 모든 왕들에게 면면히 계승 되었다.
2대 혜종은 재위 기간이 2년밖에 되지 않아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은 보이지 않지만 현휘 玄暉 절중 折中 등 많은 승려 들의 부도 탑이 이때에 세워 졌다.
3대 정종은 선왕인 태조가 숭불하던 것을 전승하여 불교 佛敎를 더욱 발전 시켰다.
정종은 10여 리나 떨어져 있는 개국사로 친히 걸어 가서 불사리 佛舍利를 봉안 하기도 하고 곡식 7만 섬을 여러 사찰에 헌납 하기도 하였으며 불명경보 佛名經와 광학보 廣學寶를 설치하여 불경을 공부 하도록 권장 하였다.
불명경보 와 광학보는 현재의 장학 재단과 같은 것으로서 그 기금은 나라에서 마련하고 기구와 운영은 각기 큰 사찰에 일임하여 불교 佛敎 학자를 길러 내도록 하였다.
4대 광종은 대보은사 大報恩寺를 궁궐 남쪽에 세우고 불일사 佛日寺를 동쪽 교외에 창건하여 태조와 그의 왕비인 유씨 劉氏의 원당 願堂으로 삼았다.
또한 왕비 유씨의 복을 빌기 위하여 숭선사 崇善寺를 새로 짓기도 하였다.
958년에는 쌍기 雙冀의 건의에 따라 승과를 채택 하였다.
이에 준하여 승과 僧科를 새로 두어 대덕 大德 대사 大師 중대사 重大師 삼중대사 三重大師 선사 禪師 대선사 大禪師 등의 선종 禪宗 법계法階와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 수좌 首座 승통 僧統의 교종 법계도 만 들었다.
승려의 국가고시 제도인 승과에는 종선 宗選과 대선 大選이 있었다.
종선은 총림선 叢林選 이라고 하는 것으로 각 종파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합격 하면 대선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일종의 예비 고사 였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본고사 대선은 크게 선종선 禪宗選과 교종선 敎宗選으로 나누어 졌는데 선종선은 주로 광명사 廣明寺 에서 교종선은 주로 왕륜사 王輪寺에서 실시 되었다.
이 승과는 고려 말 까지 내려왔고 조선 시대에는 중기에만 실시 되었다.
960년에는 오월왕 전숙 錢俶이 사신을 보내어 천태론소 天台論疏의 교전과 그 밖의 불전을 구 하였다.
이에 제관 諦觀이 천태 관계 문헌들을 가지고 송 나라에 가서 의적 義寂을 만나 중국 천태종을 다시 일으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함으로써 고려의 문화적 위신을 크게 떨쳤다.
그리고 제관은 천태 사교의 天台四敎儀를 저술하여 중국 승려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963년에는 귀법사 歸法寺 를 세우고 균여 均如로 하여금 머물게 하였고 일종의 구급 기관으로서 현재의 재해 대책 본부와 같은 상설 기관인 제위보 濟危寶를 설치 하였다.
968년 광종 19년에는 국사 왕사의 이사제도 二師制度가 시작 되었다.
광종은 홍화사 弘化寺 삼귀사 三歸寺 유암사 遊巖寺 등의 절을 창건한 뒤 혜거 惠居를 국사로 삼고 탄문 坦文을 왕사로 삼았으며 974년에 혜거가 죽자 탄문을 국사로 삼았다.
광종은 서로 싸우고 있던 각 종파의 정리에 노력하던 중 특히 당시 불교 佛敎계의 가장 큰 과제였던 선교의 융합에 유의 하였다.
그 통합의 사상 체계로서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포섭하는 천태종과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흡수하고 유학 사상이나 노장 사상 까지도 통합 하는 사상 체계인 법안종 法眼宗의 도입에 크게 노력 하였다.
이와 같은 기풍 아래 천태종 에서는 제관과 중국 천태종의 16대 조가 되어 중국 천태종의 부활에 크게 기여한 고려 승려 의통 義通 등이 배출 되었다.
법안종 에서는 지종 智宗등 36인이 중국에 파견되는 등 크게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광종의 사망에 이은 개혁의 중단으로 말미 암아 일련의 통합 운동은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광종 이후에는 다시 보수 적인 불교 佛敎가 지배 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지만 광종의 선교 통합 운동은 한국 불교 佛敎사에 있어서 가장 높이 평가할 만한 정책 중 하나 이다.
이는 위로는 원효의 통불교 운동 通佛敎運動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의천과 지눌의 불교 통합 운동에 연결 된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다.
6대 성종은 불교 佛敎 사원 세력의 지나친 팽창을 경계 하여 집을 버리고 사원으로 만드는 것을 금 하였으며 팔관회와 연등회도 폐지 시켰다.
그러나 988년에는 정월과 5월과 9월의 삼장월 三長月에 도살을 금 하였을 뿐 아니라 991년에는 승려 36명을 송 나라에 보내어 유학하게 하였으며 송 나라에서 대장경을 들여오는 등의 치적을 남긴 것으로 보아 불교 佛敎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 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화엄 華嚴에 조예가 깊었던 정토사의 탄문 坦文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7대 목종은 또다시 불사 佛事 를 크게 일으켜 진관사 津寬寺 숭교사 崇敎寺 시왕사 十王寺 등의 원찰 願刹을 창건 하였다.
8대 현종은 성종에 의하여 폐지 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부활 시켰다.
그리고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서울을 버리고 피난 하였으므로 송악은 거란병의 수중에 들어 갔다.
이때에 현종이 신하들과 함께 불력 佛力을 빌려 적을 물리 치고자 대장경 판을 각인 刻印하여 부인사 符仁寺에 보관 하였다.
초조 대장경 이라고 불리는 50축 軸의 경문이 조각 되었고 10만 송 頌의 거란장경 契丹藏經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의천 義天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은 이미 성종 때에 송 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관본 대장경 官本大藏經을 가져와 고유의 남북이장 南北二藏과 거란장 契丹藏을 교합 校合 함으로써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현종 때에는 많은 불사가 이루어 졌다.
경주 황룡사의 탑을 수리하고 중광사 重光寺 대자은 현화사 大慈恩玄化寺 봉선 홍경사 奉先弘慶寺 혜일 중광사 惠日重光寺 등을 창건 하였다.
또 궁중에서는 인왕 반야경을 자주 강설 하였으며 1019년 에는 3,200여 명의 도승 度僧 과 함께 10만여 명을 반승 飯僧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 시기에는 승려 들을 궁중으로 불러 들여 음식을 공양하는 반승이 연례 행사로 베풀어 졌다.
또한 역대 왕들은 자주 보살계 菩薩戒를 받았으며 왕자 넷이 있으면 그 중 하나를 출가 하도록 하여 더욱 불교 佛敎를 숭상 하였다.
백좌 도량 百座道場 금강경 도량 金剛經道場 소재 도량 消災道場 천제석 도량 天帝釋道場 마리지천 도량 摩利支天道場 문두루 도량 文豆婁道場 등을 여러 사찰에 개설한 것은 모두가 당시 외적을 물리 치려는 호국적 주술적 신앙 심에서 말미 암은 것이 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 佛敎 행사와 아울러 대장경의 간행 및 많은 사찰과 탑의 건립 등도 이러한 국난을 극복 하려는 호국적인 신앙심 과 직결되는 것이다.
1043년 정종 9년에는 굉확 선사 宏廓禪師가 안심사 安心寺의 동남쪽에 24개의 대사찰을 세우고 3,0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선문을 크게 진흥 하였다.
또 경행 經行 이라는 의식도 이때 부터 시작 되었다.
개경의 거리를 세 갈래로 나누어서 반야경을 메고 가면 법복을 입은 승려 들이 보행 독송 步行讀誦하고 그 뒤를 감압관 監押官과 백성들이 따랐다.
또 왕의 생일을 맞이 하면 전국의 각 사찰 에서는 기복 도량 祈福道場을 개설 하였다.
윤경회 輪經會 라는 모임도 자주 있었는데 이는 때때로 관리들이 민폐를 끼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귀족 문화의 융성과 아울러 귀족 불교 佛敎 로서 크게 번성한 불교 佛敎계 에서는 점차로 사치와 타락의 기운이 일어나게 되어 불교 佛敎의 본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게 되었다.
문종 10년 1056년에 내린 교서 敎書에는 부역을 면하기 위한 무리들이 승려가 되어 재화를 모으는 데 급급하고 밭 갈고 가축을 기르며 장사를 일삼을 뿐 아니라 사원에서 파와 마늘을 다지거나 술 냄새를 풍기며 승려의 속인 복장 여염집 출입 백성 들과의 싸움 등을 지적하고 있어 그 당시 불교 佛敎 계의 일부가 얼마나 부패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불교 佛敎의 모순은 일부 유학자 들로 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학자 들도 사상 적인 기반이 불교 佛敎에 있었기 때문에 불교 佛敎사상 자체 보다는 사원 세력의 부패를 지적 하는 데 그치고 있다.
최충 崔冲을 비롯한 이름난 유학자 12명도 용흥사 龍興寺 귀법사 歸法寺 두 절에서 면학 하여 널리 이름을 떨 쳤었다.
또한 문종 때의 국사 정현 鼎賢은 유가 밀교 瑜伽密敎를 통해 신이 神異를 나타낸 승려로서 금고경 金鼓經을 강하여 비오기를 빌기도 하였다.
선종 헌종 숙종 때의 불교 佛敎는 의천 義天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 진다.
송 나라에서 천태와 화엄학 등을 공부하고 1086년에 귀국하여 흥왕사에 머물게 되었던 의천은 흥왕사 내에 교장 도감 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나라 안에 널리 흩어져 있던 고서 古書를 수집하고 송 요 일본으로 부터 불서 佛書를 구입하여 1,010부, 4,740여 권의 속장경 續藏經을 간행 하였다.
그 뒤 조계산 선암사 仙巖寺를 중흥하고 다시 홍원사 洪圓寺 해인사 등을 거쳐 그를 위해 창건한 국청사 國淸寺로 와서 1097년 숙종 2년 처음으로 천태교관 天台敎觀을 강의하기 시작 하였다.
또한 1099년의 식년 式年에 제1회 천태종 승선 僧選을 가졌고 1101년에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천태종 대선 大選을 행 함으로써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은 명실 상부한 하나의 종파로서 공인 되었다.
많은 제자 중 가장 뛰어났던 계응 戒膺 혜소 惠素 교웅 敎雄 등은 천태종을 계승하여 그 발전에 힘을 기울 였다.
이렇듯 의천이 활발한 교화를 펴고 있는 동안에도 고려의 불교 佛敎는 좀 처럼 정화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일부 승려 들이 민심을 현혹하여 미신적 경향은 계속 증대되고 있었다.
광기 光器는 음양서 陰陽書를 위조 하였다가 발각되어 형벌에 처하여 졌고 남녀 승려가 한데 어울려 만불회 萬佛會 라는 놀이를 즐기기도 하였다.
이는 불사를 빙자한 유흥 놀이 였다.
또한 각진 覺眞은 음양 陰陽을 망발하며 백성들을 현혹 시키다가 유배 되었으며 반승을 비롯한 숱한 기복 불교 佛敎 적인 행사는 끊이지 않았다.
다만 여진족의 침략이 있었을 때 승려의 무리로 구성된 항마군 降魔軍이 조직되어 여진을 물리치는 데 공헌 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는 거두지 못 하였다.
예종 때에는 덕창 德昌 담진 曇眞 낙진 樂眞 덕연 德緣 등의 고승이 있었다.
담진은 왕사가 되어 선을 설하여 비오기를 빌었고 또 빈번히 경행 經行을 하였다.
궁중 에서는 기복 불교 佛敎로 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지방에는 뛰어난 선사 禪師가 있었다.
벼슬을 버리고 뜻하는 바 있어 설봉어록 雪峯語錄과 능엄경 楞嚴經을 가지고 이름있는 산을 두루 찾아 다니며 혼자 수도하여 불도를 깨달은 이자현 李資玄은 고려시대 선학독립 禪學獨立의 제일인자 로서 지눌 知訥에 앞선 선구자 라고도 할 수 있다.
17대 인종 때에는 전후 반승이 13회나 열렸 었는데 요망한 무리 들이 이 틈을 타서 간악한 짓을 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자는 묘청 妙淸 으로서 매우 괴이한 팔성당 八聖堂을 궁중에 두게 하고 서경 천도를 주장 하다가 1125년에 서경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고려 불교 佛敎를 순수하게 이끌어 갔던 학일 學一 탄연 坦然 등의 고승들은 있었다.
학일은 조사선 祖師禪을 제창한 승려로서 예종의 지극한 존경을 받다가 국왕의 곁을 떠나 운문사 雲門寺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 하였으며 탄연은 인종 때에 왕사가 되고 예종 즉위 뒤에도 두터운 예우를 받았으나 70세에 단속사 斷俗寺로 은퇴하여 종풍 宗風을 크게 떨쳤던 선승 이었다.
특히 그의 서법 書法은 정묘하여 고려의 명필가로 유명 하였다.
이러한 선사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불교 佛敎는 계속 타락상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의종 이후 법문 法門의 문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으나 표면 상으로는 경건한 불사 들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왕은 1147년에 왕자의 출생을 기원하여 영통사에서 50일 동안 화엄경을 강설 하였고 금은자 화엄경 2부를 사경 寫經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복자내시卜者內侍 영의 榮儀가 국가 기업의 흥망과 임금의 수명은 오직 기도를 부지런히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여 왕을 미혹 시켰고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 하려면 제석천과 관음 보살을 섬겨야 한다고 해서 두 보살상을 그려 중앙과 지방의 사원에 널리 나누어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법회를 축성법회 祝聖法會 라고 하였다.
또 안화사 安和寺에 제석수 보살 帝釋須菩薩을 새겨놓고 승려들을 모아 밤낮으로 쉬지 않고 보살의 명호를 외우도록 하고는 이를 연성법석 連聲法席 이라고 불 렀다.
영의는 이와 같이 주술을 일 삼으면서 밤을 새우며 절하는 등 다른 승려로 하여금 천만 일을 한계로 고행을 계속 하도록 하였다.
왕이 주술 적인 불사 만을 좋아 하였으므로 궁중의 뜰은 늘 승려 들로 가득 하였고 대신 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 까지 절과 탑을 다투어 지었다.
사찰은 더욱더 화려하게 꾸며졌고 왕은 자주 사찰에서 대신들과 연회를 베풀 었으며 승려 들도 이에 참여하는 경우가 빈번 하였다.
이와 같은 일로 국고가 급격히 줄어 들고 무신들이 차별을 받게 되자 이의방 李義方 등이 주동이 되어 무신의 난이 일어 났으며 왕은 거제로 쫓겨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신이 집권한 명종 때에도 나라의 사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권신 權臣 이의방 등은 권력을 남용하여 문신을 살육 하였고, 살육을 간하는 관리들 까지 욕보이는 등 그 횡포는 말할 수 없었으며 국왕은 반승을 되풀이 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1170년 의종 24년 에는 이고 李高가 승려 수혜 修惠 현소 玄素 등과 모의하여 반기를 기도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이의방에 의해 살해 되었다.
1174년 명종 4년에는 귀법사의 승려 100여 명이 성문 북쪽으로 쳐들어 가서 이의방 일파를 타도하려 하였으나 지금은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는 그에 의해서 수십 명이 죽음을 당 하기도 하였다.
이에 중광사 홍호사 귀법사 홍화사 등의 승려 2,000여 명이 개경의 동문으로 모였으나 문이 닫혀서 들어 가지 못하게 되자 성밖의 민가를 불 태우고 들어가서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하였고 이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승려 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 하였으며 개성 부근의 사찰을 약탈하고 불 태우기 까지 하는 불 상사를 초래 하였다.
마침내 이의방 형제는 승도 들의 손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고 그들의 세력을 타도한 승려 종참 宗旵과 정균 鄭筠의 횡포가 다시 시작 되었으나 그들 역시 반정에 의해서 죽음을 당 하였다.
오늘도 행복한 날 되소서
댓글목록
backlink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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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카르인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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