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佛敎 중국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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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흥사 댓글 4건 조회 16,325회 작성일 20-02-26 18:10본문
불교 佛敎가 중국에 전래된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다소 전설적인 것으로는 위략 魏略의 서융전 西戎傳에 나타나며 그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년에 대월지왕 大月氏王의 사자 이존 伊存이 불교 佛敎를 전수 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65년에 후한 명제 明帝의 이복 동생인 초왕영 楚王英이 황로 黃老와 함께 불교 佛敎를 믿었다고 한다.
이 같은 기록에서 불교 佛敎는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무역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의 북쪽 황하 유역에 전수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50년대 에는 안식국 安息國에서 온 지루가참 支婁迦讖이 반주삼매경 般舟三昧經 이라는 대승 경전을 번역 하였다.
당시의 역경승 譯經僧 들은 인도 대월지국 안식국 강거국 康居國에서 온 이방인 들 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거꾸로 구도 求道와 구법 求法을 위하여 서역으로 향 하였다.
위나라의 주자행 朱子行을 비롯하여 많은 순례승 들이 서역을 찾아 나섰다.
처음 북부 지역인 락양 洛陽 장안 長安에 전래 되었던 불교 佛敎는 그 뒤 역경승 지겸 支謙이 오나라의 서울 건업 建業에서 포교하고 월남에서 북상한 강승회 역시 오나라에 들어와 포교에 종사 함으로써 점차 남부 중국에 까지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특히 불도징 佛圖澄은 중앙 아시아의 구자국인 龜玆國人 으로서 신통력과 주술로 사람들의 신앙을 얻었고 국왕의 고문을 지냈다.
그의 제자 도안 道安은 전진왕 前秦王 부견 符堅의 신임을 받아 경전 목록과 중국인 출가자를 위한 생활 규범을 작성 하였다.
또 도안의 제자 혜원 慧遠은 여산 廬山에서 백련사 白蓮寺 를 짓고 염불 중심의 결사운동 結社運動을 전개 하였다.
특히 혜원의 사문 불경 왕자론 沙門不敬王者論은 불교 佛敎의 보편 주의와 중국의 민족 주의가 대립 하면서 불교 佛敎가 중국적 풍토에 토착화 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호교적 논설이다.
또한 서진시대 西晉時代에는 축법호 竺法護가 정법화경 正法華經 광찬반야경 光讚般若經 등을 번역 하였다.
이 무렵 중국의 일반 사상계 에서는 노장사상 老莊思想이 성행 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불교 佛敎를 노장 사상에 의하여 이해 하려는 풍조가 현저히 나타 났다.
이를 격의불교 格義佛敎 라고 하는데 불교 佛敎 사상의 공 空을 노장 사상의 무 無와 대비하여 설명하고 해석 하려는 경향이 격의 불교 佛敎의 특징 이다.
이는 불교 佛敎가 중국에서 정착하기 위한 방편 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중국 사대부 층이 불교 佛敎에 접근하는 길을 터놓은 것이다.
또 불교 佛敎의 윤회 사상이 도입되어 전생 현생 내세에 대한 인과 응보 개념이 중국인의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때 였다.
격의불교 格義佛敎 또는 격의 格義는 불교 佛敎의 중국 전래 초기인 위진시대 魏晋時代 220-420년 나타났던 불교 佛敎교리 이해 방법 또는 불교 佛敎연구 방법이다.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佛敎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사상이나 교리를 노장사상 老莊思想이나 유교사상 儒敎思想 등의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 함으로써 이해 하려고 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불교 佛敎 경전인 반야경 般若經에 나오는 공 空에 대해 노장 사상의 무 無 개념을 적용하여 그 내용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죽림 칠현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 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격의불교 格義佛敎로는 불교 佛敎에 대한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동진 東晉 317-420년 시대의 고승이었던 도안 道安 312-385년은 격의불교 格義佛敎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 하였다.
하지만 그도 격의불교 格義佛敎의 폐단을 완전히 극복 하지는 못하였는데 구마라습 鳩摩羅什 44-413년 이 불교 佛敎 경전을 본래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한 이후에야 비로소 극복 되었다.
중국 불교 佛敎의 역경사 譯經史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인물은 구마라습 鳩摩羅什 이다.
중앙 아시아 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소승 불교를 나중에는 대승 불교를 공부했던 그는 대품 반야경 금강 반야경 묘법 연화경 유마경 아미타경 등의 대승 경전과 용수의 중론 십이문론 등 중관학파 中觀學派의 논서 들을 번역 하였다.
특히 중관 사상은 그의 한역 漢譯을 근거로 중국에서 연구되기 시작 하였다.
그의 제자 승조 僧肇는 조론 肇論을 저술하여 중국인이 이해한 공 사상을 피력 하였다.
이 조론의 영향은 당대 이후 중국 불교 佛敎 사상계를 풍미 하였고 구마라습이 번역한 중론 십이문 론은 중국의 삼론종 三論宗을 전개 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동진시대 東晉時代의 역경승 이었던 불타 발타라 佛駄跋陀羅는 후대 화엄종의 소의경전 所依經典이 된 화엄경을 번역 하였다.
담무참 曇無讖은 열반경을 번역해서 중국 불교에 일체의 중생에게는 모두 다 불성이 있다는 사상을 전래하여 불성설 佛性說의 전개를 위한 계기를 마련 하였다.
또 역경승 진제삼장.眞諦三藏은 섭대승론 攝大乘論 등의 유가 학파 경전을 번역 하였을 뿐 아니라 여래장사상 如來藏思想의 대표적인 논서인 대승 기신론을 번역하여 당나라의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경전들은 역경이 이루어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 또는 100~200년의 간격을 두고 모두 우리 나라에 전래 되었으며 우리나라 고승들에 의해서 깊이 있게 연구되고 유포 되었다.
이들 경전들은 우리나라 불교의 여러 종파의 근본 경전으로 채택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 사상의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육조시대 六朝時代라 함은 강남 江南의 건업.建業에 도읍을 두었던 육왕조시대 六王朝時代를 말 한다.
육조는 강남 땅에서 번영한 귀족 정치 귀족문화 라는 공통성에 착안한 문화사 적인 명칭 이다.
육조불교 佛敎의 특색은 육조 문화의 일반적인 특색과 마찬 가지로 귀족적 고답적 학술적 이었으므로 북조 北朝의 국가적 주술적 실천 적인 불교 佛敎 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남조에는 족벌 귀족이 광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제왕 이상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높은 고전적 교양을 몸에 지니고 현학 玄學을 숭배하며 청담을 즐겼다.
불교 佛敎도 이들에게는 방외 은일적 方外隱逸 세상 밖의 뛰어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유마경과 반야경 등이 애호 되었다.
격의불교 格義佛敎가 성행된 것도 이때 였다.
여산의 혜원 慧遠이 사문 沙門은 방외 方外의 빈 賓이므로 세속적 정치 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고 주장하게 된 것도 그 자신이 동진의 귀족 사회에 몸 담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육조시대의 불교 佛敎는 전반 적으로 지배자 들의 보호를 받아 정치에 참여하는 승려도 많았을 뿐 아니라 북조에서 있었던 폐불 廢佛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등이 사원 불당 불상 불경 등을 파괴하고 승려을 환속 시키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장원과 노비를 몰수한 불교 佛敎 탄압 사건도 없었고 왕후 귀족에 의하여 웅대한 사원이 건립 되어서 불교 佛敎의 연구 시대라고 칭할 만큼 경론의 연구와 강설이 성 하였다.
제 齊 나라의 태자 문혜 文惠 와 동생 숙자량 肅子良은 열렬한 불교 佛敎 신자로서 많은 학승을 가까이 하여 강석 講席과 법회를 설치하고 불교 佛敎 서적의 편찬 사업을 행 하였다.
양 梁 나라의 무제 武帝는 남조의 여러 제왕들 중에서도 높은 교양을 가지고 있어서 불교 佛敎의 교리에도 정통 하였다.
그는 스스로 단주육문 斷酒肉文을 저술하고 대사원을 건립 하였으며 육지나 물에 있는 고혼을 천도 하는 법회인 무차대회 無遮大會를 10여 차례나 열었다.
역경 사업도 육조 시대에 가장 성행 하였다.
앞에서 열거한 외에도 강량야사 畺良耶舍 구나발타라 求那跋陀羅 등의 외국승과 법현 法顯 등의 중국 승이 활약 하였다.
또한 양대 梁代에는 승황 僧晃 법운 法雲 지장 智藏의 3대 법사가 출현하고 또 불교 佛敎
사가로 유명한 승우 僧祐는 출삼장기집 出三藏記集 과 홍명집 弘明集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고승전 高僧傳을 지은 혜교 慧皎도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수 나라와 당 나라는 중국 불교 佛敎가 새로운 전개를 보이게 된 시대 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불교 佛敎에 가장 큰 폭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도 이 시대의 불교 佛敎 이다.
남북의 분열을 통일한 수 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 나라는 통일 국가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불교 佛敎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정의 경론에 입각한 새로운 조직화가 진행 되었다.
그 대표 적인 특색이 종파불교 宗派佛敎 이다.
수 나라 당 나라 이전에도 비담종 毘曇宗 섭론종 攝論宗 성실종 成實宗 지론종 地論宗 열반종 涅槃宗 등의 종 宗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파라고 불러야 할 것이고 후대에 생겨난 종파 와는 다른 것이 었다.
학파로 부터 종파로의 발전을 촉진한 계기가 된 것은 사원 경제의 독립과 교판 敎判의 확립이다.
수 나라의 지의 智顗가 대성한 천태종이 법화경을 지상으로 하는 독자적인 교판을 확립하여 처음으로 종파를 만들 었다.
당 나라 때에는 법장 法藏이 화엄경을 중심으로 불교 佛敎를 체계화 하여 화엄 교리를 완성 하였다.
또한 도선 道宣은 계율 戒律을 연구하여 율종 律宗을 창시 하였고 현장 玄奘과 규기 窺基는 인도의 새로운 유가 유식설 瑜伽唯識說을 기초로 하여 법상종 法相宗을 열었다.
아울러 선무외 善無畏 금강지 金剛智 불공 不空 등이 들여온 밀교의 융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종과 화엄종이 수 나라 당 나라 불교 佛敎의 사상적 절정 이라고 한다면 선종 禪宗과 정토교 淨土敎는 불교 佛敎의 중국화와 민중화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선종은 5조 홍인 弘忍의 무렵에 이르러 도속 道俗의 귀의하는 자가 급증하게 되었고 6조 혜능 慧能은 그때까지 없었던 도시에 대한 포교를 중시 하였다.
홍인으로 부터 갈라지게 된 혜능의 계통은 남종선 南宗禪 이라 불리고 신수 神秀의 계통은 북종선 北宗禪 이라 불렸는데 이 두 파는 처음 대등한 교세를 유지 하였으나 얼마 뒤에 북종은 쇠퇴하고 말았다.
정통교는 담란 曇鸞 이후 도작 道綽 선도 善道가 나와 구칭염불 口稱念佛을 보급 함으로써 무지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아 많은 신자를 획득 하였다.
845년의 폐불과 연속된 전란으로 말미 암아 불교 佛敎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으나 불립문자 不立文字를 표방한 선종과 민중의 마음속 깊이 파고든 정토교는 그 세력을 더 하여 갔다.
수 나라 당 나라의 불교 佛敎는 중국 불교 佛敎 정점에 위치 한다.
선 禪은 인도에서 기원된 것이나 중국에 전해져서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되어 유력한 종파의 하나가 되었다.
선종의 조사 祖師인 보리달마 菩提達磨는 이입 사행설 二入四行說에 입각한 좌선을 권장 하였다.
선종은 그 뒤 혜가 승찬 도신 홍인에게 차례로 전해 졌고 홍인의 시대에는 법회에 참가하는 이가 700명에 이르 렀다.
당 나라 초기에는 신수의 북종과 혜능의 남종이 대립 하여 분열 되었다.
북종은 차츰 닦아 깨닫는 점오 漸悟를 남종은 단번에 깨닫는 돈오 頓悟를 표방 하였다.
혜능은 6조가 되어 그 문하에 회양 懷讓 행사 行思 신회 神會 등이 있었고 강서와 호남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 하였다.
그리고 백장 百丈은 선원에 있어서의 규범이 되는 청규 淸規를 만 들었다.
특히 혜능 이후 5대에 걸쳐서 위앙 潙仰 임제 臨濟 조동 曹洞 운문 雲門 법안종 法眼宗의 5가 家가 성립 됨으로써 송대 宋代 이후 불교의 주류를 이루 었다.
우리 나라는 6조 혜능의 남종선을 이어 받아 신라 말에 선문구산 禪門九山이 성립 되었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5가 중 임제종의 선을 이어 받아 현재의 조계종 曹溪宗에 까지 그 맥락은 이어지고 있다.
밀교의 발달은 현교 顯敎에 대응하여 불교의 비밀 심오한 교리를 뜻하는 밀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된 것은 동진 시대의 전반에 백시리 밀다라 帛尸梨密多羅와 담무란 曇無蘭에 의하여 대관정신주경 大觀頂神呪經 시기병경 時氣病經 청우주경 請雨呪經 등의 많은 밀교 경전이 번역된 것으로 부터 시작 되었다.
이들 경전은 병을 고치고 몸이 날으는 경공술 비를 오게 하는 주문이나 제천 諸天의 위덕을 찬미 하는 따위의 주문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을 잡밀 雜密 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술적인 면이 지나 치게 강조되어 순수한 밀교 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진언다라니 眞言陀羅尼나 그 밀법 密法은 중국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 당나라 때의 선무외 금강지 불공의 3대사 三大士에 의하여 밀교 교리와 의식궤범 만다라 등이 조직되고 체계화 되었다.
이들이 전한 밀교는 대일경 이나 금강정경 등에 기초를 둔 인도의 정통 밀교로 잡밀에 대응하여 순밀 純密 이라고 부른다.
이 순밀 또한 선무의 제자 였던 불가사의 不可思議 등에 의해 신라로 전래 되었으나 종파로 까지 발전 되었음을 입증하는 사료는 찾아볼 수 없다.
유 불 도 3교의 담론 당나라 중기 부터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대표자 들은 궁중에서 잦은 토론회를 가졌 었다.
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3교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궁중에 초대하여 토론을 벌이는 행사가 매년 개최 되었다.
3교의 담론은 당나라 초기 고조 高祖 때부터 시작 되었다고 하며 고조는 624년에 박사 博士 서광 徐廣에게 효경 孝經을 사문 혜승 慧乘 에게는 반야심경을 도사 유진희 劉進喜 에게는 노자를 각각 강의하게 하였다.
또 태종 太宗은 639년에 공영달 孔穎達 사문 혜정 慧淨 도사 채황 蔡晃의 3인에게 홍문전 弘文殿 에서 3교에 대한 담론을 하게 하였다.
그 뒤 대종 덕중 경종 문종 무왕 선종 의종 소종 등의 역대 황제들도 연례 행사로 개최 하였으나 차츰 형식화 되면서 진지한 맛이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3교의 담론은 초기의 종교 토론회 성격과는 달리 전혀 내용이 없는 궁중 의례의 하나로 변질되고 말았다.
3교의 논쟁은 당나라 중기 부터 격화 되었으나 논쟁의 이면에는 서로 융합 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서 절에서는 노자의 상을 그려 붙이기도 하고 유자 儒者나 도사로서 불교를 연구하여 출가하는 사람 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교선일치 敎禪一致 선종과 교종이 교세를 확장하여 가면서 말과 글을 통하여 가르침을 펴는 화엄종 천태종 등의 교종과 말과 글에 의하지 않고 부처님의 마음을 전 하고자 하는 선종이 서로 일치 한다는 주장을 낳게 되었다.
교선 일치의 주장은 당나라 중기의 화엄종 제4대조 징관 澄觀의 사상으로 부터 싹이 터서 제5대조 종밀 宗密에 의하여 명료한 형태로 나타 났다.
종밀은 처음 선을 공부하고 뒤에 징관의 가르침을 받아 화엄 교학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엄과 선을 융합하여 일치 시키고자 교선 일치론을 주장하였다.
이 교선 일치의 사상은 송대 宋代에 이르러 차츰 뚜렷 해져서 선종과 교종의 융합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송나라 초기에 연수 延壽가 주장한 교선 일치를 비롯하여 천태선 화엄선 염불선 등이 두드러지게 유행하게 되었고 교종을 배우는 자가 선문 禪文을 선에 몸을 담은 자가 교종의 제학 諸學을 탐구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우리나라 에서는 고려의 의천 義天과 지눌 知訥이 교선 일치의 사상을 깊이 포용하여 교관병수 敎觀竝修 정혜쌍수 定慧雙修 등을 주창 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한 정통으로 정착 시켰다.
송나라의 불교 佛敎는 염불선 念佛禪 송학 宋學과 선 禪의 교류 거사불교 居士佛敎의 성립 백련교 白蓮敎 등으로 집약 된다.
염불선은 당나라 중기에 일어난 교선일치 운동은 송나라 때에 더욱 두드러 지게 되었다.
연수의 교선일치 설이 확립 되자 천태 화엄 정토종의 학도로서 선을 연구 하거나 선가에서 교학을 공부하는 이도 출현 하였다.
그리고 정토종은 특별한 하나의 종파로서 보다는 이들 각 종파의 사람들이 염불 신앙을 가지게 됨으로써 성행하게 되었다.
송대의 정토 교도로서 유명한 이들 중에는 선종이나 천태종 출신자 들이 많았고 특히 천태종 계통의 정토교가 성행 하였다.
선종에서는 염선일치 念禪一致를 주창 하려고 종경록 宗鏡錄 만선동귀집 萬善同歸 을 지은 연수를 비롯하여 종이 宗頤 종본 宗本 법수 法秀 의회 義懷 등은 모두 염불선을 강조 하였고 선정습합 禪淨習合을 취했던 인물들 이었다.
거사들로는 양걸 楊傑 왕일휴 王一 休 등이 유명하다.
이와 같은 풍조는 선종을 더욱 성행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인물들이 일반 사회의 종교로서 민중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애호되고 보급 되었던 정토교를 배워 매일의 일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게 됨에 따라 염불선 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명대 明代 와서도 역시 선정융합 禪淨融合의 형태인 염불선이 성행 하였으며 청조 淸朝의 옹정제는 스스로 원명거사 圓明居士라 칭하고 염불선을 고취 하였다.
민간에서는 명나라 이후 이와 같은 염불선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고 실천 되었다.
선과 송학 宋學은 송나라 때에는 훈고학 訓詁學 을 탈피하고 성 性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성리학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를 송학 이라고 한다.
송학자들 중에는 학문과 실천의 방법으로서 참선을 익힌 이들이 많다.
주돈이 周敦頤는 귀종사의 불인 佛印과 동림사의 상총 常總으로 부터 불교의 학문을 배웠고 장재 張載도 상총에게 배웠으며 정이 程頤도 선을 배웠다.
특히 주자 朱子는 어릴 때부터 종고 宗杲의 대혜어록 大慧語錄을 애독하고 당나라의 선사인 위산 潙山의 사상을 사랑 하였다.
선이 당시의 이름 있는 유학자를 사로잡게 된 이유는 선이 간단명료한 교리에 의거하여 적절한 수행 방법으로 지심견성 指心見性을 터득할 수 있게 하기 때문 이었다.
또한 당시에 차차 정비되어 간 승원 僧院은 다른 종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고 그 중에도 초범탈속 超凡脫俗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후배를 지도 하였고 기지에 차고 준열한 문답과 대담이 가득찬 선가 禪家의 어록에는 청신하고 기발한 문자가 약동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에 충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선종의 제1서라고 일컬어 지는 벽암록 碧巖錄과 당나라 중기 이후에 처음으로 교계의 표면으로 나타난 능엄경은 많은 사람에게 애독 되었고 거사 居士로서 주석서를 남긴 이들도 있다.
송나라 이후 명 나라 청 나라 때에도 중국 불교 佛敎는 삼종일원 三宗一源 민간 불교 佛敎 등의 독특한 성격을 띠면서 발달 하였으나 우리 나라는 조선 시대의 배불 정책으로 불교가 쇠퇴되어 명나라 이후의 중국 불교는 우리 나라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인도의 불교가 원류로서 한국 불교의 뿌리를 점한 것이 라면 중국 불교는 각 시대마다 한국 불교가 새로운 옷을 입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고려 말까지 중국 불교의 큰 특색은 우리 나라에 수용 변형되어 새로운 물결을 조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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