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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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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5,919회 작성일 14-09-1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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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도가학파는 대체로 사관출신들 이었다.그들은 성패, 존망, 화복 등 고금의 도를 빠짐없이 널리 기록한 다음 그 요점을 파악하여 근본을 안다.
3.음양가학파는 대체적으로 희화(희씨와 화씨, 상고시대의 天地四時를 관장하던 관리출신들이다. 上天을 삼가 순종하고 일월성숙 운행을 추산하여 천문을 알아 농사를 쉽게 알려 준다.
4.법가학파는 대체로 理官(옥사를 심리하는 벼슬, 즉 법관을 말함)출산이다. 그들은 상벌을 엄히하여 禮制를 보충.역경 서합쾌에서는 형벌을 밝히고 법률을 제정한다.
5.명가학파는 禮官출신들이다. 옛날엔 명칭과 직위에 따라 대우가 달랐다.그것을 예로 정했다.
6.묵가학파는 데체로 청묘를 지켰다.그들은 초가집에 살며 겸애를 익히고 귀신을 숭상하고 숙명을 믿지않고 효로써 천하를 다스린다.
7.종횡가학파는 대체로 주나라 관직은 행인(아침에 천자를 알현하고 외교관일을 함))출신들이다. 실제의 상황을 보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이 학파의 장점이다.
8.잡가학파는 대체로 議官(관쟁하는 사람)출신이다. 그들은 유가, 묵가, 법가의 학설을 한데 통합시켰다. 왕의 다스리는 도는 모든 것을 관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9.농가학파는 농직農稷(농업에 종사하는 관리)출신들이다. 팔정을 중시했다. 첫째는 식(백성에게 농경의 부지론함을 가르친다.)둘째는, 화(백성에게 물건을 아끼는 것을 가르친다.)셋째는 사(백성에게 귀신을 존경하게 가르친다.), 넷째는 사공(백성이 편안히 살도록한다.)다섯째는 사구(도둑과 강간을 다스린다.)여섯째는 사도(백성에게 예의를 가르킨다.)일곱째는 빈(백성에게 손님 접대를 가르킨다.)여덟째는 사(군대를 말한다.)이중에서 식과 재화를 중히 여겼다.
10.소설가학파는 대체로 매관(거리의 풍속도을 기록한다.)출신들이다.마을의 소지자가 언급한 일도 역시 잊지 않도록한다. 이것이 유흠의 열가지 기원설이다.
유흠설의 수정
유흠의 학설레 오류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제자백가의 기원설을 정치적, 경제적인 면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기원전10의 중국은 정치구조의 최상부에는 주왕실이 있고, 그 아래 제후국들이 각자의 영토을 가지고 경제, 군사적으로 독립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나라는 주왕실과 대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일부는 주왕실을 천자로 받든다.
각 제후국들은 토지를 대부에게 봉토를 분활하고 정치경제의 단일 체제를 이루었다. 토지의 소유자는 곧 그곳의 통치자다. 이들은 스스로 을 가당치도 않게 군자라 칭한다.이 반대편의 무식자 농민은 소인, 서민으로 불려지고 군자의 농토를 관장하며 전시에는 군사로 동원 되었다. 귀족은 통치자이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계급이고 학문에 중심이다. 주왕실에 속한 관리들은 각분야 학문에 특기를 가지고 활동했다. 서민은 글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관리와 교사의 구별이 없었다, 교사는 돈을 받고 교육을 가르치는 가르치는 사람으로 후에 등장한다. 봉건제도는 기원전221년 진시황에 의하여 붕괴 되고 군국제가 나타났다. 그러나 수천년 뒤에도 이런 제도가 지주와 농민들 사이에 있었다.
봉건제도가 언제 붕괴 되었는지는 알수가 없다.진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여불위의 직업이 상인인것을 보면 봉건사화가 상업사회로 전환되어 엄청난 힘을 발휘 했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토지를 잃은 귀족의 평민이 되었고 그들의 학문이 일반 민중에게 전파되는 계기과 되었다. 그러하여 공자의 예문지에 보면 예가 상실되어 향촌으로 갔다는 뜻의 의미가 여기 있다. 사상을 돈받고 타인에게 가르치 것이 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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