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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5,965회 작성일 14-07-1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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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은 혜능과 마찬가지로 수상삼학은 열등한 닦음으로 깨침이 없는 점문의 것이라 하고 자성삼학은 깨침이 있은 뒤의 삼학이라고 구분한다. 즉 깨침 이전의 정혜는 정과 혜가 쌍수가 못되고 선후가 있는 닦음이며 깨친 이후라야 비로소 쌍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닦음은 깨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닦음은 정과 혜가 등지요 쌍수인 닦음이다.

隨相定慧― 漸門의 修 : 有爲有心
相을 따르는 禪定과 智慧 : 선정과 지혜가 선후가 있음 : 깨침을 통하지 않은 닦음.
自性定慧― 頓門의 修 : 無爲無心
마음에 卽한 선정과 지혜 :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음 : 깨침을 통한 닦음.

지눌은 오후수인 점수에 자성정혜와 수상정혜를 함께 포용하는 원융성을 보인다. 그 까닭은 각인의 능력과 근기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오후에도 수승한 근기의 사람은 자성정혜로 닦을 것 없는 닦음[無修而修]이 있을 뿐이나 그렇지 못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은 오후에도 대치하는 수상문 정혜의 원용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각인의 능력과 근기를 중시하는 것이야말로 지눌의 원융한 자비 방편문으로 원효 이래 통불교적인 전통의 한 특색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수상정혜를 닦으며 또 어떤 사람이 자성정혜를 닦을 것인가?

먼저 수상정혜를 닦아야 할 경우를 보자.
즉, 수상문의 정혜를 닦아야 할 사람은 첫째 번뇌의 업장과 습기가 두텁고 무거운 반면, 관행은 약하고 마음이 가라앉지 못하고 들떠 있는 사람, 둘째 무명은 깊고 지혜는 적어서 선하고 악한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담담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사람,
실로 혜능은 돈오돈수(頓悟頓修)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길을 제시치 않고 있으나 지눌이야말로 혜능의 돈문에 서면서도 열등한 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점문의 닦음까지도 차용하는 방편을 시설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오후(悟後)의 수상문 정혜는 비록 점문의 수행을 차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전(悟前)의 단순한 점문의 수행과는 전연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돈오후의 닦음인 것이므로 깨침을 즉한 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깨치기 이전의 수와는 달리 자성에 대한 의심이 없는 진수(眞修)이며 단지 점문의 수를 일시적인 방편으로 쓸 뿐인 것이다.

깨침 이전의 닦음과 이후의 닦음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지눌에 의하면 깨침 이전의 닦음은 물들은 닦음, 즉 오염수라는 것이다. 오염수란 무엇보다도 깨침이 없으므로 근본적인 의심의 뿌리가 남아 있는 닦음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노력하여 닦지만 곳곳에서 의심에 빠져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깨침은 마음의 근본 바탕을 투철히 보는 것이므로 그럴 때 의심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깨친 후의 닦음은 비록 점문의 닦음을 빌려쓰더라도 그것은 깨침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물들지 않은 참다운 닦음[眞修]이다. 비록 산란과 혼침을 대치하는 노력의 방편으로 빌려쓰지만 깨친 뒤의 닦음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침이 있으므로 의심이 없고 따라서 [나]라는 생각에도 물들음이 없다. 또한 이러한 닦음은 번뇌의 실체가 본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쳤으므로 번뇌를 끊되 끊음이 없는[無斷而斷] 무위의 닦음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지눌은 오전의 수에 대하여 거의 침묵을 지키고 오후수를 강조하고 있다.

대근지인(大根之人)을 위한 자성정혜란 어떠한 것인가?

깨친 후에 ①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무심하며, ② 이로움과 이롭지 못함,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꾸지람, 즐거움과 괴로움 등의 여덟 가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번뇌에도 동요하지 않고, ③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세 가지 느낌에도 마음이 조용한 사람은 수승한 근기로 자성정혜를 닦을 뿐이다.

자성정혜란 본래 마음이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일여(一如)한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일상생활 그대로가 닦음일 뿐 특별한 시간과 장소, 노력이 필요한 닦음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혜능이 말하는 돈수며 일행삼매와 다르지 않다. 혜능의 특성이 [頓悟頓修 亦無漸次]로 점문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면 지눌의 특성은 오후 수에도 각인의 근기에 따라 적합한 닦음의 길을 제시함에 있다.

지눌의 오후수 즉 점수의 수행은 휴헐망심(休歇妄心)하는 자리행과 중선(衆善)을 실천하는 이타행을 수심의 정(正)과 조(助)로 함께 겸해야 완성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

깨침 이전의 修 : 점문 //////// 돈오 이후 : 돈문의 점수[眞修]

隨相定慧[汚染修]
① 自利行
自性定慧―수승한 근기
隨相定慧―열등한 근기
② 利他行 --모든 근기

이렇게 볼 때 지눌의 돈오점수는 사실상 단순한 체계가 아니라 대소근기의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돈오+자성정혜의 수승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체계는 사실상 혜능이 강조하는 돈오돈수와 다름이 없다. 이때의 돈오점수는 돈문이 가장 높은 길이며 따라서 [돈오]는 단순한 해오(解悟)의 경지가 아니라 증오(證悟)의 차원에로까지 승화된다.

반면에 돈오+수상정혜 지도체계는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접화하는 길로서 이때의 점수는 점문의 수행을 가차하고 있으며 따라서 돈오 역시 해오에 가까운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지눌의 돈오점수에 있어서 돈오를 일괄해서 해오로 규정하는 것은 구체적 내용을 무시한 무리한 평가이다.

돈오점수와 경절문(徑截門)

{불일보조국사비명}에 의하면 지눌은 성적등지(惺寂等持), 원돈신해(圓頓信解), 경절(勁截)의 삼문을 시설하여 중인(衆人)을 제접(提接)하였다고 한다. 이 삼종문을 깨침과 닦음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첫 두 문은 돈오점수의 지도체계에 포섭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경절문이란 무엇인가? [경절]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으로 경절문이란 소위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단도직입적인 길을 말한다.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 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즉, 여기서 지눌은 두 가지 길을 상론하고 있으니 ① 먼저 듣고 아는 것으로 믿어 들어가고[先以聞慧信入] 다음에 무사(無思)로 계합[後以無思契同]하는 길과, ② 처음부터 이치와 뜻을 듣고 아는 어로, 의로 심식 사유함이 없이 바로 몰자미한 화두를 들어 깨치는 길의 두 가지가 그것이다.
전자가 교가 혹은 인교오심(因敎悟心)하는 관행자를 위한 것으로 교와의 융회를 기본으로 한다면 후자는 경절득입(徑截得入)의 문으로 선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향한 그야말로 교외별전하는 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지눌의 돈오점수의 체계는 전자 즉 인교오심의 관행자를 위한 일반적인 지도체계라는 점이다.
거기에 비해 경절문은 인교오심이 아니라 오히려 인교오심의 약점인 지해(知解)의 병을 파하기 위한 직접적인 길로써 시설하고 있으니 이는 선종이 과량지기(過量之機)를 위한 화두선이다. 이 단도직입적인 경절문의 시설이야말로 선이 교를 바탕으로한 융선(融禪)의 입장뿐만 아니라 본분종사(本分宗師)의 면목 또한 잃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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