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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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137회 작성일 14-07-03 11:58본문
원효
[개설]
원효의 집은 본래 율곡(栗谷)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나, 어머니가 원효를 임신하고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출산을 하였다. 이 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 불렀다고 전하며, 또 밤이 이상하게 커서 이를 사라밤[裟羅栗]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 자리가 남아 있다. 그 밑 골짜기에는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불지촌은 발지촌(發智村) 또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활동사항]
원효는 경상북도 압량(押梁)[현 경산시] 출신으로 15세경에 출가하여 수도에 정진하였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전적(典籍)을 섭렵하였는데, 기록에는 원효가 고구려로부터 망명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와 있던 보덕(普德)을 스승으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慈藏)으로부터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원효는 울산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 경상남도 양산 지역 출신인 낭지(朗智)를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받고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였다.
원효는 당시의 풍조에 따라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가, 여행 도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는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 실계(失戒)한 뒤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 행세를 하였다. 광대 복장으로 지내며 『화엄경(華嚴經)』의 이치를 쉬운 내용으로 담은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민중 속에 퍼뜨렸다.
원효는 많은 글을 저술하였으나, 문자나 형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원효는 인간이 값어치 있기 위해서는 본연의 맑은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위풍당당한 법사(法師)였지만 어떤 때는 소박하고 겸허한 서민이기도 하였는데, 법복을 입었다 하여 깨쳤다고 교만해진다면 오히려 구제받을 수 없는 진짜 천민이라고 갈파했다.
원효가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 3권을 지어 황룡사에서 설법하였는데,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왕자·공주, 그리고 여러 대신과 전국의 절에서 온 명망 높은 고승들에게 『금강삼매경』의 강해(講解)를 시작하였다. 원효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정연하여,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들의 입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양산 지역에서 원효대사의 활동 및 이야기는 다양한 문헌 설화와 이 지역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구비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양산 지역 원효 설화로는 천성산 내지 원효봉 설화가 유명하다. 이들 설화는 공통적으로 원효가 천성산에서 득도하기까지 수련한 과정이 나타나 있다. 이렇듯 원효가 천성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양산 지역의 불교는 활황의 시대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학문과 사상]
원효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 일심사상(一心思想)이다. 원효의 일심사상은 저서인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원효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둘째,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원효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원효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원효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원효의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 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셋째, 무애사상(無碍思想)이다. 원효의 무애사상은 자신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원효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원효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원효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효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원효의 사상, 특히 화엄사상은 양산 지역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원효 설화에서 잘 나타나 있다.
[저술 및 작품]
원효는 일생 동안 86부 180여 권의 저서(혹은 100여 부 240권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를 남겼다. 신라 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저술을 남긴 대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질(質)에서도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당시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존하는 원효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특히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평가를 받은 저작으로서 원효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개설]
원효의 집은 본래 율곡(栗谷)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나, 어머니가 원효를 임신하고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출산을 하였다. 이 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 불렀다고 전하며, 또 밤이 이상하게 커서 이를 사라밤[裟羅栗]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 자리가 남아 있다. 그 밑 골짜기에는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불지촌은 발지촌(發智村) 또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활동사항]
원효는 경상북도 압량(押梁)[현 경산시] 출신으로 15세경에 출가하여 수도에 정진하였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전적(典籍)을 섭렵하였는데, 기록에는 원효가 고구려로부터 망명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와 있던 보덕(普德)을 스승으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慈藏)으로부터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원효는 울산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 경상남도 양산 지역 출신인 낭지(朗智)를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받고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였다.
원효는 당시의 풍조에 따라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가, 여행 도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는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 실계(失戒)한 뒤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 행세를 하였다. 광대 복장으로 지내며 『화엄경(華嚴經)』의 이치를 쉬운 내용으로 담은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민중 속에 퍼뜨렸다.
원효는 많은 글을 저술하였으나, 문자나 형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원효는 인간이 값어치 있기 위해서는 본연의 맑은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위풍당당한 법사(法師)였지만 어떤 때는 소박하고 겸허한 서민이기도 하였는데, 법복을 입었다 하여 깨쳤다고 교만해진다면 오히려 구제받을 수 없는 진짜 천민이라고 갈파했다.
원효가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 3권을 지어 황룡사에서 설법하였는데,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왕자·공주, 그리고 여러 대신과 전국의 절에서 온 명망 높은 고승들에게 『금강삼매경』의 강해(講解)를 시작하였다. 원효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정연하여,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들의 입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양산 지역에서 원효대사의 활동 및 이야기는 다양한 문헌 설화와 이 지역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구비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양산 지역 원효 설화로는 천성산 내지 원효봉 설화가 유명하다. 이들 설화는 공통적으로 원효가 천성산에서 득도하기까지 수련한 과정이 나타나 있다. 이렇듯 원효가 천성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양산 지역의 불교는 활황의 시대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학문과 사상]
원효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 일심사상(一心思想)이다. 원효의 일심사상은 저서인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원효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둘째,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원효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원효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원효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원효의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 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셋째, 무애사상(無碍思想)이다. 원효의 무애사상은 자신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원효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원효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원효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효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원효의 사상, 특히 화엄사상은 양산 지역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원효 설화에서 잘 나타나 있다.
[저술 및 작품]
원효는 일생 동안 86부 180여 권의 저서(혹은 100여 부 240권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를 남겼다. 신라 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저술을 남긴 대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질(質)에서도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당시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존하는 원효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특히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평가를 받은 저작으로서 원효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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