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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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241회 작성일 14-06-11 11:45본문
제 1회 결집.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직후(B. C 500년경)에 왕사성 밖의 칠엽굴에서 이루어졌다. 가섭존자를 우두머리로 하여 모두 500명의 아라한들이 모여서 결집을 하였는데 먼저 우파리 존자가 율(律藏)을 외어 내고 다음에 아난존자가 경장(經藏)을 외어 내면, 모인 대중이 상의하여 불설(佛說)로서 인정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때의 결집은 문자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500명의 대중이 내용을 함께 외우는 형식이었다. 이것을 대합송(大合誦)이라고 한다. 이 결집에 대하여 500명이 모여서 행하였다고 해서 500집법 또는 지명을 따서 왕사성 결집이라고 부른다.
제 2회 결집.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약 100년경(B. C 400년경)에 비사리성에서 700명의 비구들이 모여 행해졌다. 그 동기는 불교가 매우 번성하던 비사리 성내에서 비구들이 계율 중 비교적 미미한 항목들에 관하여 생활상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서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를 보다 못한 야사라는 비구가 부처님의 유계(遺戒)를 바로 잡기 위한 회합을 해 달라고 각지의 비구들에게 격문을 돌리어 제청 한데서 유래한다. 이를 700집법 또는 비사리성 결집이라 함.
이 모임에서 부처님의 계율에 대하여 진보적인 태도를 보인 비구들의 견해를 모두 그르다 하여 이른바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고 규정짓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진보 성향의 비구들은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따로 집회를 가져서 십사(十事)를 옳다고 천명하였으니 이것이 불교 교단의 첫 분열인 셈인데, 십사(十事)에 대하여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규정한 야사 등의 보수적인 비구들을 상좌부(上座部)라고 하며, 부처님의 정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규정한 진보적인 비구들을 대중부(大衆部)라고 부르게 된다. 이를 불교 교단의 근본 분열로 본다.
문제가 되었던 십사
01. 염사정(鹽事淨): 전날 받은 소금을 저축해 놓았다가 다음 식사 때 쓸 수 있다.
02. 이지정(二指淨): 밥 때인 정오가 지나서 해 그늘이 손가락 둘 사이를 지날 때까지는 먹을 수 있다.
03. 수희정(隨喜淨): 자기 몫의 밥을 먹은 뒤에 남는 다른 사람의 밥이 있다면 그것을 또 먹을 수 있다.
04. 도행정(道行淨): 사원을 떠나서는 먹은 뒤에 또 먹을 수 있다.
05. 낙장정(酪獎淨): 우유나 양의 젖, 꿀, 석청 등은 밥 때가 아니라도 먹을 수 있다.
06. 치병정(治炳淨): 치료를 위하여서는 덜 된 술을 마실 수가 있다.
07. 좌구정(坐具淨): 몸이 크고 작음에 따라 방석을 알맞게 만들 수 있다.
08. 구사정(舊事淨): 율의 해석상 전례에 따라서 행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09. 고성정(高聲淨): 수계나 참회 때에 먼저 갈마(羯磨)를 행하고 나온 사람에게 자신이 행하였던 일이 계율에 합당한 것인가라고 동의를 구한다.
10. 금은정(金銀淨): 금, 은 따위의 보시를 받을 수 있다.
제 3회 결집
불멸 후 약 250년경(B. C 250년경)에 화씨성에서 있었다. 당시 화씨성의 계원사에는 육만 여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는데, 외도들이 승려를 가장하여 승가 대중의 화합을 깨트리므로 그들을 정리하고 부처님의 교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제수라는 비구가 아쇼카 왕의 후원 아래에 천명의 비구들을 선정하여 이루어졌다. 이를 一千集法 또는 화씨성 결집이라고 한다.
제 4회 결집
A. D 2세기경에 캐슈미르 환림사에서 있었다. 당시 강력한 군주요 독실한 불자였던 카니슈카 왕은 매일 승려 한사람을 초청하여 설법을 듣고, 스스로도 여러 경론을 보다가 그 논설이 동일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의아하게 생각을 하여 협존자에게 물어 본 결과, 불교 내에 여러 부파가 있어서 각 부파 마다 교의를 해석함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왕은 각 부파의 이설(異說)을 통일시키고자 협존자와 상의를 하여 삼장(三藏)에 통한 비구 500명을 뽑아서 결집을 행하였던 것이다. 이 때 상수(賞首)를 세우(世友)로 하여 법구, 묘음, 각천, 협존자 등이 경장(經藏)의 주석(註釋書)인 달마비바사 十萬頌, 율장(律藏)의 주석서인 비나야비바사 십만 송, 논장(論藏)인 아비달마비바사 십 만송, 총 三十萬頌의 大註釋書를 만들었는데 왕은 동판에 새겨서 석함에 넣고 큰 보탑을 세워 그 속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비달마비비사 만이 전하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부처님 법에 대한 결집은 제 4회 결집 외에도 여러 차례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본 제 1회에서 제 4회 결집의 내용은 모두 소승의 삼장이다. 따라서 대승의 삼장 역시도 결집이 된 것이 틀림이 없지만 그 전말은 현재 알려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분명히 우리는 대승에 관한 삼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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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직후(B. C 500년경)에 왕사성 밖의 칠엽굴에서 이루어졌다. 가섭존자를 우두머리로 하여 모두 500명의 아라한들이 모여서 결집을 하였는데 먼저 우파리 존자가 율(律藏)을 외어 내고 다음에 아난존자가 경장(經藏)을 외어 내면, 모인 대중이 상의하여 불설(佛說)로서 인정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때의 결집은 문자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500명의 대중이 내용을 함께 외우는 형식이었다. 이것을 대합송(大合誦)이라고 한다. 이 결집에 대하여 500명이 모여서 행하였다고 해서 500집법 또는 지명을 따서 왕사성 결집이라고 부른다.
제 2회 결집.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약 100년경(B. C 400년경)에 비사리성에서 700명의 비구들이 모여 행해졌다. 그 동기는 불교가 매우 번성하던 비사리 성내에서 비구들이 계율 중 비교적 미미한 항목들에 관하여 생활상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서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를 보다 못한 야사라는 비구가 부처님의 유계(遺戒)를 바로 잡기 위한 회합을 해 달라고 각지의 비구들에게 격문을 돌리어 제청 한데서 유래한다. 이를 700집법 또는 비사리성 결집이라 함.
이 모임에서 부처님의 계율에 대하여 진보적인 태도를 보인 비구들의 견해를 모두 그르다 하여 이른바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고 규정짓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진보 성향의 비구들은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따로 집회를 가져서 십사(十事)를 옳다고 천명하였으니 이것이 불교 교단의 첫 분열인 셈인데, 십사(十事)에 대하여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규정한 야사 등의 보수적인 비구들을 상좌부(上座部)라고 하며, 부처님의 정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규정한 진보적인 비구들을 대중부(大衆部)라고 부르게 된다. 이를 불교 교단의 근본 분열로 본다.
문제가 되었던 십사
01. 염사정(鹽事淨): 전날 받은 소금을 저축해 놓았다가 다음 식사 때 쓸 수 있다.
02. 이지정(二指淨): 밥 때인 정오가 지나서 해 그늘이 손가락 둘 사이를 지날 때까지는 먹을 수 있다.
03. 수희정(隨喜淨): 자기 몫의 밥을 먹은 뒤에 남는 다른 사람의 밥이 있다면 그것을 또 먹을 수 있다.
04. 도행정(道行淨): 사원을 떠나서는 먹은 뒤에 또 먹을 수 있다.
05. 낙장정(酪獎淨): 우유나 양의 젖, 꿀, 석청 등은 밥 때가 아니라도 먹을 수 있다.
06. 치병정(治炳淨): 치료를 위하여서는 덜 된 술을 마실 수가 있다.
07. 좌구정(坐具淨): 몸이 크고 작음에 따라 방석을 알맞게 만들 수 있다.
08. 구사정(舊事淨): 율의 해석상 전례에 따라서 행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09. 고성정(高聲淨): 수계나 참회 때에 먼저 갈마(羯磨)를 행하고 나온 사람에게 자신이 행하였던 일이 계율에 합당한 것인가라고 동의를 구한다.
10. 금은정(金銀淨): 금, 은 따위의 보시를 받을 수 있다.
제 3회 결집
불멸 후 약 250년경(B. C 250년경)에 화씨성에서 있었다. 당시 화씨성의 계원사에는 육만 여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는데, 외도들이 승려를 가장하여 승가 대중의 화합을 깨트리므로 그들을 정리하고 부처님의 교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제수라는 비구가 아쇼카 왕의 후원 아래에 천명의 비구들을 선정하여 이루어졌다. 이를 一千集法 또는 화씨성 결집이라고 한다.
제 4회 결집
A. D 2세기경에 캐슈미르 환림사에서 있었다. 당시 강력한 군주요 독실한 불자였던 카니슈카 왕은 매일 승려 한사람을 초청하여 설법을 듣고, 스스로도 여러 경론을 보다가 그 논설이 동일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의아하게 생각을 하여 협존자에게 물어 본 결과, 불교 내에 여러 부파가 있어서 각 부파 마다 교의를 해석함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왕은 각 부파의 이설(異說)을 통일시키고자 협존자와 상의를 하여 삼장(三藏)에 통한 비구 500명을 뽑아서 결집을 행하였던 것이다. 이 때 상수(賞首)를 세우(世友)로 하여 법구, 묘음, 각천, 협존자 등이 경장(經藏)의 주석(註釋書)인 달마비바사 十萬頌, 율장(律藏)의 주석서인 비나야비바사 십만 송, 논장(論藏)인 아비달마비바사 십 만송, 총 三十萬頌의 大註釋書를 만들었는데 왕은 동판에 새겨서 석함에 넣고 큰 보탑을 세워 그 속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비달마비비사 만이 전하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부처님 법에 대한 결집은 제 4회 결집 외에도 여러 차례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본 제 1회에서 제 4회 결집의 내용은 모두 소승의 삼장이다. 따라서 대승의 삼장 역시도 결집이 된 것이 틀림이 없지만 그 전말은 현재 알려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분명히 우리는 대승에 관한 삼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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