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종교의 관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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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705회 작성일 13-08-08 23:53본문
유교란 무엇인가
서장
1.여자의 姓을 돌려주는 유교
결혼에서 여자의 성을 바꾸기 시작한 것은 실제적으로 메이지 유신에서 각자에게 성씨를 사용하라고 하면서 이다. 일본 여성들의 독립적인 사고 곧 시집살이에서 죽어서 영혼으로 독립하고 싶어 하는 것을 서양의 문물에서 영향으로 남자 가문의 성을 따르게 했다.
쿠마야 카이사쿠가 지은 책 일본의 근대화와 家제도 , 에서 보면은 위의 사실이 나타난다.1898년 이전의 일본에서도 유교적인 동성불혼을 따르고 있다. 이는 철저한 중국 고대의 방식이다. 일본은 영혼가 백골을 동일시하는 祖靈觀이 있다. 이것을 체계화 한 것은 유교이다. 이것은 세계유일의 이론이다. 일본사람의 조령의식은 불교보다 유교에 가깝다.
2.불교에서 말하는 죽음
불교는 세상을 괴로움으로 본다. 가장 큰 것은 죽음이다. 죽을 때의 괴로움은 살아 있는 기간에 비례한다고 한다. 생, 노, 병, 사의 네 가지 괴로움은 인간의 숙명이며, 죽음은 누구에게나 확실히 찾아오는 것이다. 이 이상 평등한 것은 없다.
육체의 죽음으로 영혼은 떠돈다. 육체는 껍질로 화장한다. 불교에서는 뼈에서는 의미가 없다.
불교에서는 49재이식으로 윤회의 고통을 덜어준다.
삶은 괴롭고 환생하는 것도 괴롭다. 이 처럼 영혼이 바꾸어 태어난다. 말하자면 전생하는 것이다. 존재는 멸하는 것이 기본적인 불교의 생각이다. 불교의 의식적이면 을 유교에서 찾아야 한다.
3.중국 사람의 현세관
풍토적으로 인도는 열악한 환경이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을 안다. 중국 사람들은 문자에 보듯이 모든 것이 표의 이다. 사람이 현실이고 즉물적 이라고 본다. 현세의 쾌락이 최고라는 현세관이다.
4.유교에서 말하는 죽음
중국 사람은 현세에서 오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이들은 죽어서 현세로 빨리 돌아오는 것을 생각했고 죽은 뒤에 현세와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뼈의 모음인 묘가 생겼다. 중국인들은 초혼의례 즉 혼을 초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유ㅣ백을 만들어 혼과 백을 부른다. 유라는 것은 본래 무당이다. 조상, 나, 자식 즉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한다. 제사와 부모의 존경 그리고 자손을 낳는 일을 효로 본다. 나의 생명은 실은 아버지, 조상, 참으로 아득한 조상이다. 효를 다 함으로써 생명의 근원과 만날 수 있다. 생명론 이것이 효의 본질이다.
제1장 유교의 종교성
일반적으로 유교를 종교성을 배척한다. 다만 유교의 사외규범과 윤리만을 언급한다. 하지만대중적인 지지 그것도 밑으로의 지지가 유교의 종교성을 말한다.
2.종교의 정의
무엇인가의 절대성과 외경심이 종교다. 라고 생각하는 구미의 종교관의 오만함으로는 유교의 종교성을 논할 수 없다.
3.유교의 종교성
종교란 무엇인가, 왜 필요한 가이다. 니시아 게이지는 종교란 사람의 필요에 의해 등장한다고 했다. 실제적인 사람에게 등장한다. 종교의 의식화는 죽음이다. 죽음 뒤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 종교이다. 그래서 유교는 죽음과 삶의 매끄러운 연결을 했다. 공자교 국에서 전한의 무제가 동중서의 헌책으로 유가의 교설을 기초로 정통교학으로서 고정하고, 이후 청말까지 왕조지배의 체제교학이 된 사상. 이 유교는 정치 ∙ 문화의 담당자였던 사인(士人,관인지주층)의 주된 사상이 되고, 역사 ∙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불교 ∙ 도교의 교설을 수용해서 교의를 풍부하게 하였는데, 유교사상의 사적 전개가 바로 전근대 중국의 사상사의 주류를 이루었다. 따라서 군현제 제국의 왕조체제가 극복되는 근대화 과정에서 유교는 사상 ∙ 문화상의 타도목표가 되어 비판되었다. 또한 유교는 과거의 우리나라, 베트남, 일본의 문화형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특히 주자학은 이들 지역의 정권과 결부되어서 장기간 정통교학의 위치를 차지했다. 통상 유교의 학문적인 면을 〈유학〉이라고 하며, 교학적 성격을 그 개조의 이름을 따서 공자교라고도 하는데, 영어로는 Confucianism이라 고한다. 유교의 기본적 교의는 오륜오상, 수기치인, 천인합일, 세속적 합리주의이다.
오륜오상
삼강오륜(군신 ∙ 부부와 형제 ∙ 붕우)의 신분 혈연적 관계를 인륜질서로 보고, 가족조직에서 정치체제까지 관철하는 구체적 규정을 구비한다. 이런 인간관계를 지지하는데 필요한 도덕이 오상(인 ∙ 의 ∙ 예 ∙ 지 ∙ 신)이며, 그 습득을 위한 인간론 ∙ 의식론이 반복되었다.
수기치인
오상을 수양하고(수기), 오륜질서의 실현에 노력하는(치인) 부단한 교화가 통치층 사인(군자)의 임무이다. 공자는 <예악> 문화를 선왕주공의 정교로서 조술하였는데, <예(禮)>는 지배층 씨족내부의 계층질서의 규정, 즉 경천 ∙ 숭조의 일상 의례를 수반하는 부계혈연 집단의 조직규정으로, 제 ∙ 정 ∙ 교 일치의 질서규정이다. 조계 ∙ 부자의 상하질서를 근간으로서 <효제(孝悌)> 도덕에 의해서 유지하려고 하였다. 춘추 후기는 사회발전에 따라서 일치체제의 해체기에 해당하며, 공자는 <효제> 도덕을 보편화한 <인>의 덕의 실천을 주장하고, 그것을 주축으로 <예악> 문화의 재편을 시도했다. 유교는 이렇게 <예>의 학습과 <인> 덕의 수양이 <수기>의 안목이 되며, 인민에 대한 교화주의가 <치인(治人)> 정치의 특색이 되었다.
천인합일
맹자, 순자를 거친 유가사상은 <인>, <예>, 즉 안과 밖의 세계를 모두 <천(자연의 이법)>에 근거지이며, 맹자는 천여의 부성의 실현을 인간의 선으로 보고, 순자는 인간의 <예> 체계를 <천>에 합치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국가통치의 <군신의 의(군주와 신료의 관계질서)>에는 법가계의 <형명(刑名)>사상이 침투한 진 ∙ 한기 이후 동중서계 <춘추>학의 <천>의에 의거한 <명분>주의가 정착했는데 <예교> 문화의 이법화이다.
세속적 합리주의
이들 교의는 정교적 문명을 포괄하는 고성(古聖)의 길로서 기록한 <경서(오경—역, 서, 시, 예, 춘추)>에 서술되며, 한대 춘추학의 <명분> 주의와 음양오행사상이 더해져서 고대 제국적 규모에 적용되며 『역전』의 우주론에 의해서 <삼강>적 가부장제의 관념이 무한하게 확대되어 국교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인도를 중심으로 주장하는 원시유가사상은 신비적 ∙ 주술적인 색채를 농후히 하고, 한 ∙ 위기의 참위설의 유행은 이 비합리적 경향을 증폭시켰다.
일정한 <예교>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현실처리의 정술로서는 왕조권력에 의존해서 세속적 권위를 띠고 고성의 전통을 배경으로 한 교학적 권위를 갖추었다. 그 이후 사인의 사상은 <경학(경전해석학)>의 형식을 취해서 전개되었다. 역사 ∙ 사회의 진전에서 <예교> 체제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유교는 <경서> 해석의 틀을 확대하고 불교나 도교 등을 자기의 틀안에 짜넣어서 <예교> 체제로부터의 사인의 이반을 방지했다. 송대(10세기) 이후, 수 ∙ 당 귀족제의 해체로 과거를 발판으로 신흥계급이 관인지배층으로서 등장하자, 통일왕조의 국내 ∙ 국제적 정치 ∙ 경제상의 긴장상태 중에서 국가주의적 <명분> 사상이나 정통론을 전개시키고, 불교 ∙ 도교의 유행에 의한 사상적 위기감에서 도의심을 배양해서 고성의 길을 주체적으로 체득하려 한 신유학, 즉 송학이 탄생했다. 이는 <삼강오륜>과 <오상>을 <이(理, 천리)>라고 선언하고, <(기(氣)>에 의한 만물 (자연과 사람)의 차이를 주장하였으며, 가부장제적 〈예교〉 체제를 <이기(理氣)>이념으로 체계지어 세련된 천인합일사상, 주자학으로서 완성되었다.
주자학이 기본으로 한 <사서(『대학』, 『중용』, 『논어』, 『맹자』)>는 재야의 성현이 의견을 나눈 정교집성이며, 송학에 의해서 천하통치의 방책을 각 개인의 책임과 자발성에서 습득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거기에는 <예교> 체제하의 사인이 상대적 자립성을 강화하고, 적극 주체적으로 <예교> 이데올로기로서 수행해야 할 정치 ∙ 사회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으며, 주자학이 정통 교학이 된 이유가 있다. 명 ∙ 청 시기에 군립한 주자학은 봉건질서의 내부 모순이 증대함에 따라서, 그 보강책으로서 명대의 양명학이 등장하였다. 한편 양명좌파(왕학좌파)는 <예교> 체제의 기만성을 지적하고 욕망 긍정의 <동심>설을 내세워서 유교비판을 하는데, 본격적인 유교부정은 농민운동으로서 그리스도교에 의거한 태평천국 사상이었다. 20세기를 맞이한 시기에 사인층에서 변법파, 혁명파가 각각 유교비판을 전개하는데, 완전한 극복에는 신해혁명(1911) 후의 5 . 4운동의 <공가점 타도>를 거쳐서(문학혁명, 공자비판), 현실을 변혁하는 인민 해방의 혁명운동에 의한 체제변혁을 필요로 하였다. 강유위의 공자교는 기독교에 대항하여 공자를 교주로 했다.
서장
1.여자의 姓을 돌려주는 유교
결혼에서 여자의 성을 바꾸기 시작한 것은 실제적으로 메이지 유신에서 각자에게 성씨를 사용하라고 하면서 이다. 일본 여성들의 독립적인 사고 곧 시집살이에서 죽어서 영혼으로 독립하고 싶어 하는 것을 서양의 문물에서 영향으로 남자 가문의 성을 따르게 했다.
쿠마야 카이사쿠가 지은 책 일본의 근대화와 家제도 , 에서 보면은 위의 사실이 나타난다.1898년 이전의 일본에서도 유교적인 동성불혼을 따르고 있다. 이는 철저한 중국 고대의 방식이다. 일본은 영혼가 백골을 동일시하는 祖靈觀이 있다. 이것을 체계화 한 것은 유교이다. 이것은 세계유일의 이론이다. 일본사람의 조령의식은 불교보다 유교에 가깝다.
2.불교에서 말하는 죽음
불교는 세상을 괴로움으로 본다. 가장 큰 것은 죽음이다. 죽을 때의 괴로움은 살아 있는 기간에 비례한다고 한다. 생, 노, 병, 사의 네 가지 괴로움은 인간의 숙명이며, 죽음은 누구에게나 확실히 찾아오는 것이다. 이 이상 평등한 것은 없다.
육체의 죽음으로 영혼은 떠돈다. 육체는 껍질로 화장한다. 불교에서는 뼈에서는 의미가 없다.
불교에서는 49재이식으로 윤회의 고통을 덜어준다.
삶은 괴롭고 환생하는 것도 괴롭다. 이 처럼 영혼이 바꾸어 태어난다. 말하자면 전생하는 것이다. 존재는 멸하는 것이 기본적인 불교의 생각이다. 불교의 의식적이면 을 유교에서 찾아야 한다.
3.중국 사람의 현세관
풍토적으로 인도는 열악한 환경이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을 안다. 중국 사람들은 문자에 보듯이 모든 것이 표의 이다. 사람이 현실이고 즉물적 이라고 본다. 현세의 쾌락이 최고라는 현세관이다.
4.유교에서 말하는 죽음
중국 사람은 현세에서 오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이들은 죽어서 현세로 빨리 돌아오는 것을 생각했고 죽은 뒤에 현세와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뼈의 모음인 묘가 생겼다. 중국인들은 초혼의례 즉 혼을 초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유ㅣ백을 만들어 혼과 백을 부른다. 유라는 것은 본래 무당이다. 조상, 나, 자식 즉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한다. 제사와 부모의 존경 그리고 자손을 낳는 일을 효로 본다. 나의 생명은 실은 아버지, 조상, 참으로 아득한 조상이다. 효를 다 함으로써 생명의 근원과 만날 수 있다. 생명론 이것이 효의 본질이다.
제1장 유교의 종교성
일반적으로 유교를 종교성을 배척한다. 다만 유교의 사외규범과 윤리만을 언급한다. 하지만대중적인 지지 그것도 밑으로의 지지가 유교의 종교성을 말한다.
2.종교의 정의
무엇인가의 절대성과 외경심이 종교다. 라고 생각하는 구미의 종교관의 오만함으로는 유교의 종교성을 논할 수 없다.
3.유교의 종교성
종교란 무엇인가, 왜 필요한 가이다. 니시아 게이지는 종교란 사람의 필요에 의해 등장한다고 했다. 실제적인 사람에게 등장한다. 종교의 의식화는 죽음이다. 죽음 뒤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 종교이다. 그래서 유교는 죽음과 삶의 매끄러운 연결을 했다. 공자교 국에서 전한의 무제가 동중서의 헌책으로 유가의 교설을 기초로 정통교학으로서 고정하고, 이후 청말까지 왕조지배의 체제교학이 된 사상. 이 유교는 정치 ∙ 문화의 담당자였던 사인(士人,관인지주층)의 주된 사상이 되고, 역사 ∙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불교 ∙ 도교의 교설을 수용해서 교의를 풍부하게 하였는데, 유교사상의 사적 전개가 바로 전근대 중국의 사상사의 주류를 이루었다. 따라서 군현제 제국의 왕조체제가 극복되는 근대화 과정에서 유교는 사상 ∙ 문화상의 타도목표가 되어 비판되었다. 또한 유교는 과거의 우리나라, 베트남, 일본의 문화형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특히 주자학은 이들 지역의 정권과 결부되어서 장기간 정통교학의 위치를 차지했다. 통상 유교의 학문적인 면을 〈유학〉이라고 하며, 교학적 성격을 그 개조의 이름을 따서 공자교라고도 하는데, 영어로는 Confucianism이라 고한다. 유교의 기본적 교의는 오륜오상, 수기치인, 천인합일, 세속적 합리주의이다.
오륜오상
삼강오륜(군신 ∙ 부부와 형제 ∙ 붕우)의 신분 혈연적 관계를 인륜질서로 보고, 가족조직에서 정치체제까지 관철하는 구체적 규정을 구비한다. 이런 인간관계를 지지하는데 필요한 도덕이 오상(인 ∙ 의 ∙ 예 ∙ 지 ∙ 신)이며, 그 습득을 위한 인간론 ∙ 의식론이 반복되었다.
수기치인
오상을 수양하고(수기), 오륜질서의 실현에 노력하는(치인) 부단한 교화가 통치층 사인(군자)의 임무이다. 공자는 <예악> 문화를 선왕주공의 정교로서 조술하였는데, <예(禮)>는 지배층 씨족내부의 계층질서의 규정, 즉 경천 ∙ 숭조의 일상 의례를 수반하는 부계혈연 집단의 조직규정으로, 제 ∙ 정 ∙ 교 일치의 질서규정이다. 조계 ∙ 부자의 상하질서를 근간으로서 <효제(孝悌)> 도덕에 의해서 유지하려고 하였다. 춘추 후기는 사회발전에 따라서 일치체제의 해체기에 해당하며, 공자는 <효제> 도덕을 보편화한 <인>의 덕의 실천을 주장하고, 그것을 주축으로 <예악> 문화의 재편을 시도했다. 유교는 이렇게 <예>의 학습과 <인> 덕의 수양이 <수기>의 안목이 되며, 인민에 대한 교화주의가 <치인(治人)> 정치의 특색이 되었다.
천인합일
맹자, 순자를 거친 유가사상은 <인>, <예>, 즉 안과 밖의 세계를 모두 <천(자연의 이법)>에 근거지이며, 맹자는 천여의 부성의 실현을 인간의 선으로 보고, 순자는 인간의 <예> 체계를 <천>에 합치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국가통치의 <군신의 의(군주와 신료의 관계질서)>에는 법가계의 <형명(刑名)>사상이 침투한 진 ∙ 한기 이후 동중서계 <춘추>학의 <천>의에 의거한 <명분>주의가 정착했는데 <예교> 문화의 이법화이다.
세속적 합리주의
이들 교의는 정교적 문명을 포괄하는 고성(古聖)의 길로서 기록한 <경서(오경—역, 서, 시, 예, 춘추)>에 서술되며, 한대 춘추학의 <명분> 주의와 음양오행사상이 더해져서 고대 제국적 규모에 적용되며 『역전』의 우주론에 의해서 <삼강>적 가부장제의 관념이 무한하게 확대되어 국교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인도를 중심으로 주장하는 원시유가사상은 신비적 ∙ 주술적인 색채를 농후히 하고, 한 ∙ 위기의 참위설의 유행은 이 비합리적 경향을 증폭시켰다.
일정한 <예교>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현실처리의 정술로서는 왕조권력에 의존해서 세속적 권위를 띠고 고성의 전통을 배경으로 한 교학적 권위를 갖추었다. 그 이후 사인의 사상은 <경학(경전해석학)>의 형식을 취해서 전개되었다. 역사 ∙ 사회의 진전에서 <예교> 체제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유교는 <경서> 해석의 틀을 확대하고 불교나 도교 등을 자기의 틀안에 짜넣어서 <예교> 체제로부터의 사인의 이반을 방지했다. 송대(10세기) 이후, 수 ∙ 당 귀족제의 해체로 과거를 발판으로 신흥계급이 관인지배층으로서 등장하자, 통일왕조의 국내 ∙ 국제적 정치 ∙ 경제상의 긴장상태 중에서 국가주의적 <명분> 사상이나 정통론을 전개시키고, 불교 ∙ 도교의 유행에 의한 사상적 위기감에서 도의심을 배양해서 고성의 길을 주체적으로 체득하려 한 신유학, 즉 송학이 탄생했다. 이는 <삼강오륜>과 <오상>을 <이(理, 천리)>라고 선언하고, <(기(氣)>에 의한 만물 (자연과 사람)의 차이를 주장하였으며, 가부장제적 〈예교〉 체제를 <이기(理氣)>이념으로 체계지어 세련된 천인합일사상, 주자학으로서 완성되었다.
주자학이 기본으로 한 <사서(『대학』, 『중용』, 『논어』, 『맹자』)>는 재야의 성현이 의견을 나눈 정교집성이며, 송학에 의해서 천하통치의 방책을 각 개인의 책임과 자발성에서 습득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거기에는 <예교> 체제하의 사인이 상대적 자립성을 강화하고, 적극 주체적으로 <예교> 이데올로기로서 수행해야 할 정치 ∙ 사회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으며, 주자학이 정통 교학이 된 이유가 있다. 명 ∙ 청 시기에 군립한 주자학은 봉건질서의 내부 모순이 증대함에 따라서, 그 보강책으로서 명대의 양명학이 등장하였다. 한편 양명좌파(왕학좌파)는 <예교> 체제의 기만성을 지적하고 욕망 긍정의 <동심>설을 내세워서 유교비판을 하는데, 본격적인 유교부정은 농민운동으로서 그리스도교에 의거한 태평천국 사상이었다. 20세기를 맞이한 시기에 사인층에서 변법파, 혁명파가 각각 유교비판을 전개하는데, 완전한 극복에는 신해혁명(1911) 후의 5 . 4운동의 <공가점 타도>를 거쳐서(문학혁명, 공자비판), 현실을 변혁하는 인민 해방의 혁명운동에 의한 체제변혁을 필요로 하였다. 강유위의 공자교는 기독교에 대항하여 공자를 교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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