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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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561회 작성일 13-12-06 00:15본문
此洌水丁鏞之墓也。本名曰若鏞。字曰美庸。又曰頌甫。號曰俟菴。堂號曰與猶。取冬涉畏鄰之義也。
이는 열수(洌水; 한강)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명은 약용(若鏞)이고, 자(字)는 미용(美庸) 또는 송보(頌甫)라고 한다.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니,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父諱載遠。蔭仕至晉州牧使。母淑人海南尹氏。以英宗壬午六月十六日。生鏞于洌水之上馬峴之里。時惟乾隆二十七年也。
아버지의 이름은 재원(載遠)이며, 음사(蔭仕)로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해남윤씨이다. 영종 임오년(영조 38, 1762) 6월 16일에 열수 가의 마현리에서 용을 낳았다. 그 때가 건륭(乾隆) 27년이 된다.
丁氏本貫押海。高麗之末。居于白川。本朝定鼎。遂居漢陽。始仕之祖。承文校理子伋。自玆繩承。弘文館副提學壽崗,兵曹判書玉亨,議政府左贊成應斗,大司憲胤福,江原道觀察使好善,弘文館校理彦璧,兵曹參議時潤。皆入玉堂。自玆時否。徙居馬峴。三世皆以布衣終。高祖諱道泰,曾祖諱恒愼,祖父諱志諧。唯曾祖爲進士也。
정씨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에는 백천(白川)에 살다가, 조선이 세워지면서[定鼎] 마침내 한양에서 살았다. 처음 벼슬을 한 조상은 승문원 교리(承文院 校理)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쭉 이어져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수강(壽崗),병조판서(兵曹判書) 옥형(玉亨),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 응칠(應斗),대사헌(大司憲) 윤복(胤福),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 호선(好善),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 언벽(彦璧),병조참의(兵曹參議) 시윤(時潤)은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시운이 막혀서 마현으로 옮겨 살았으며, 3세가 모두 벼슬 없이 마쳤다. 고조의 이름은 도태(道泰)이고 증조는 항신(恒愼), 조부는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만이 진사(進士)가 되었다.
鏞幼而穎悟。頗知文字。九歲有母之喪。十歲始督課。五年之間。先考閒居不仕。鏞得以是讀經史古文頗勤。又以詩律見稱。十五而娶。適先考復仕爲戶曹佐郞。僑居京內。時李公家煥以文學聲振一世。姊夫李承薰又飭躬勵志。皆祖述星湖李先生瀷之學。鏞得見其遺書。欣然以學問爲意。
용은 어려서 매우 영리하였고 제법 문자를 알았다. 9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10세에 비로소 학과에 힘썼다. 5년 동안 아버지(先考)가 벼슬을 하지 않고 한가하게 살았으므로, 용은 경전과 역사서․옛 글들(經史古文) 읽기를 매우 부지런히 할 수 있었다. 또한 시율(詩律)로 칭찬을 받았다. 15세에 장가들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다시 벼슬을 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어 서울에 임시로 살았다[僑居]. 이때 이가환이 문학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자부(姊夫;매형) 이승훈 또한 몸을 삼가고 뜻을 가다듬어 모두 성호 이익선생의 학문을 조술(祖述)하였다. 용은 그 남긴 책들을 볼 수 있었는데, 흔연히 학문에 뜻을 두었다.
正宗元年丁酉。先考出宰和順縣。厥明年讀書東林寺。
정종 원년 정유(1777),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나가게 되었고 이에 이듬해에는 동림사(東林寺)에서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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