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과 심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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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5,985회 작성일 13-12-16 09:10본문
1.머리말
2.본말
i.김창흡
ii.심환지
iii, 석실서원
3.맺음말
1.머리말
신유사화가 일어나고 또한 많은 천주교의 문제로 사회가 혼란하고 남인의 많은 선비가 죽어나가고 또한 천주교도가 죽어 나갈 때 다산은 살아남았다.
왜 가장 공격받기 좋은 위치의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심환지는 왜 그를 살려 주었을까.?
여기서 고민의 시작된다. 혼인 이나 인맥이나 학맥이나 하나는 분명히 고리가 있을 것이다. 그 고리를 학연으로는 남양주의 석실서원을 거론하고 인맥으로는 심환지의 처가를 고려했다. 현재도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그런 일들이 한 학자의 생명을 구하고 많은 저술을 하게 만들었다. 더욱 당시의 상황으로 절대로 같이 할 수 없었던 두 집단이 하나의 연결 고리가 형성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위에서 뜸금없이 창흡현조께서 등장한 것도 또한 분명히 그분의 사상과 학맥이 연결 고리가 되었음을 충분히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가장 싫어 한 것 중에 하나가 당쟁에 의한 희생이다. 지금부터 본말에서 추론을 시작하려고 한다. 물론 고증과 추론이 혼재할 수 있으나 이는 보편타당한 것이 될 것이다.
2.본말
i.삼연 김창흡
그는 아버지가 수항이고 청음의 김상헌의 6대손이다.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상헌(尙憲)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성두(星斗)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과 예조판서·지돈녕부사 등을 지낸 창협(昌協)이다.
이단상(李端相)(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자는 유능(幼能)이다.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 정구(廷龜)이다. 아버지는 대제학 명한(明漢)이며, 어머니는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딸이다.)의 문인이다.
그는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형 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즉,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말한 형 창협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또한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는 이(理)를 좌우로 갈라 쌍관(雙關)으로 설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표리(表裏)로 나누어 일관(一關)으로 설명한 이이의 주장을 찬성하였다.
그의 삶은 숙종때 당쟁으로 그의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 되면서 설악산 영시암으로 은거 하면서 많은 작품활동과 사상이 집대성되었다. 또한 다산이 그를 위대한 학자로 칭하면서 그의 6대손인 대산과의 깊은 친분을 나누었다.
그의 철학적인 면을 굉장히 따랐다. 왜 남인 그가 노론인 삼흡을 흡모 했을까. 이는 그가 권세와 세상에 초연 하였으므로 시간적 차이에도 당시의 남인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적인 면은 태극이 이일분수(理一分殊; 이가 나누어져서 달라진 것)임을 말하고, 주자(朱子)가 ≪중용≫의 천명지위성장(天命之謂性章)에 대한 주(註)한 것에 의거하여 인성(人性)의 동이(同異)를 논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인품을 성인(聖人)과 대현(大賢)·군자(君子)·선인(善人)·속인(俗人)·소인(小人) 등 6등급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이 부분이 나중에 심환지로 연결된다. 그의 나이 47세때 석실서원을 지었는데 여기가 심환지와 다산의 연결점이다. 다산의 외가인 해남윤씨 문중이 서원의 입구에 있어서
다산은 자주 왕래 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자손이 김대산과 인연을 맺고 공부하였다.
2.본말
i.김창흡
ii.심환지
iii, 석실서원
3.맺음말
1.머리말
신유사화가 일어나고 또한 많은 천주교의 문제로 사회가 혼란하고 남인의 많은 선비가 죽어나가고 또한 천주교도가 죽어 나갈 때 다산은 살아남았다.
왜 가장 공격받기 좋은 위치의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심환지는 왜 그를 살려 주었을까.?
여기서 고민의 시작된다. 혼인 이나 인맥이나 학맥이나 하나는 분명히 고리가 있을 것이다. 그 고리를 학연으로는 남양주의 석실서원을 거론하고 인맥으로는 심환지의 처가를 고려했다. 현재도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그런 일들이 한 학자의 생명을 구하고 많은 저술을 하게 만들었다. 더욱 당시의 상황으로 절대로 같이 할 수 없었던 두 집단이 하나의 연결 고리가 형성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위에서 뜸금없이 창흡현조께서 등장한 것도 또한 분명히 그분의 사상과 학맥이 연결 고리가 되었음을 충분히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가장 싫어 한 것 중에 하나가 당쟁에 의한 희생이다. 지금부터 본말에서 추론을 시작하려고 한다. 물론 고증과 추론이 혼재할 수 있으나 이는 보편타당한 것이 될 것이다.
2.본말
i.삼연 김창흡
그는 아버지가 수항이고 청음의 김상헌의 6대손이다.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상헌(尙憲)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성두(星斗)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과 예조판서·지돈녕부사 등을 지낸 창협(昌協)이다.
이단상(李端相)(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자는 유능(幼能)이다.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 정구(廷龜)이다. 아버지는 대제학 명한(明漢)이며, 어머니는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딸이다.)의 문인이다.
그는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형 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즉,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말한 형 창협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또한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는 이(理)를 좌우로 갈라 쌍관(雙關)으로 설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표리(表裏)로 나누어 일관(一關)으로 설명한 이이의 주장을 찬성하였다.
그의 삶은 숙종때 당쟁으로 그의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 되면서 설악산 영시암으로 은거 하면서 많은 작품활동과 사상이 집대성되었다. 또한 다산이 그를 위대한 학자로 칭하면서 그의 6대손인 대산과의 깊은 친분을 나누었다.
그의 철학적인 면을 굉장히 따랐다. 왜 남인 그가 노론인 삼흡을 흡모 했을까. 이는 그가 권세와 세상에 초연 하였으므로 시간적 차이에도 당시의 남인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적인 면은 태극이 이일분수(理一分殊; 이가 나누어져서 달라진 것)임을 말하고, 주자(朱子)가 ≪중용≫의 천명지위성장(天命之謂性章)에 대한 주(註)한 것에 의거하여 인성(人性)의 동이(同異)를 논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인품을 성인(聖人)과 대현(大賢)·군자(君子)·선인(善人)·속인(俗人)·소인(小人) 등 6등급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이 부분이 나중에 심환지로 연결된다. 그의 나이 47세때 석실서원을 지었는데 여기가 심환지와 다산의 연결점이다. 다산의 외가인 해남윤씨 문중이 서원의 입구에 있어서
다산은 자주 왕래 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자손이 김대산과 인연을 맺고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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