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사

자연과 더불어 삶의 지혜를 스스로 갖게 하는 곳 백련산 신흥사

기초교리

정약용 과 심환지2

페이지 정보

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5,678회 작성일 14-01-11 21:57

본문

iii.석실사원
이 사원은 실학과 성리학 그리고 북학 남인과 서인의 회통이 장이 된 특이한 곳이다. 아래에 살펴보겠지만 다산의 정치적인 생명과 몇몇 남인들이 출세의 연결고리가 된 곳이다. 이 사원은 1656년(효종 7)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척화신이었던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663년(현종 4) 석실사(石室祠)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97년(숙종 23)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단상(李端相)이 배향되었고, 그 이후 김창집·김창협(金昌協)·김창흡·김원행· 김이안·김조순 등이 추가 배향되었다.
석실서원은 조선 중화주의 이후 진경문화에서부터 북학사상(北學思想)에 이르는 집권세력 내부 자기혁신 문화운동의 최대 산실이자 뇌수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경종 대에 세력이 위축되었던 석실서원이 다시 전성기를 맞은 것은 영조 대였다. 이때의 교육은 김창협의 손자인 김원행이 주도했는데, 그는 서원의 학습 규정을 새롭게 마련하고 학생들이 숙식할 건물을 추가로 지었으며, 학생들에게 경세학에도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김원행의 문하에서는 박윤원, 홍대용, 황윤석 같은 학자들이 교육을 받았는데, 홍대용과 황윤석은 청의 발달된 문물을 도입하자는 북학론을 주장하는 학자가 되었다.
김원행의 아호인 \'미호(渼湖)\'는 석실서원 앞을 흐르는 한강의 별칭이었다. 석실서원은 18세기 진경문화와 북학사상의 산실로 기능하였다. 석실서원이 발전한 데에는 노론계 학자의 중심지라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지만 남인이나 실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곳은 윤선도도 공부한 곳이다. 이자료는 전국서원 연구서에서 나온 것이다.


3.맺음말

심환지와 다산의 관계는 두 가지로 보면 하나는 지역의 연결이다. 외가인 윤씨 집안과 심환지 처가 집가의 관계 또 하나는 삼연 김창흡에 대한 공통적인 학풍의 흡모와 연구에 있다. 다산이나 심환지는 좌우가 분명한 사상이 들어난다. 삼연의 위의 예에서 보듯 70칙 자체가 두렸한 것을 나타내고 특히 심환지가 주장한 40세에 출사하는 것도 삼연의 학문적인 수양과 정신적인 수양 즉 남인적인 학풍이 연결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학문의 장인 석실서원이 그 둘의 연결 고리가 된다. 실학과 성리학의 극적인 만남의 장소 그리고 서인과 남인의 만남의 장소 여기에 연결 된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죽음의 고리를 피해 갈 수 있었다. 더욱이 다산의 삼연에 대한 찬탄은 그을 죽음에서 살리는 극적인 역활을 했을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종무소 전화번호 : 02-395-1222

계좌안내 : 하나은행 753-810169-89707 [예금주 신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