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불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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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246회 작성일 14-06-24 12:51본문
不生亦不滅(불생역불멸), 不常亦不㫁(불상역불단)
不一亦不異(불일역불이), 不來亦不出(불래역불출)
산사지기::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으며
동일(同一)되어 있음도 아니요 다름이 있음도 아미며
옴도 아니요 또한 가는 것도 아니로다.
강론::
불생(不生)이란 무생(無生)을 뜻한다.
즉 남이 없음을 이른 말이다.
그렇다면 난다는 것은 무엇이 나며
나는 현상은 무엇을 말하기에
남이 없다 결론 지은 것일까?
나는 주체가 있는가?
우리는 난다는 것은
태어남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래 주체가 있다면 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본래 내가 있어서 난 것인가?
내가 없는데 잠시 나타난 것인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나는 주체가 있는가부터 논하겠다.
내가 주체가 있다면
난다는 일은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란 것이 있는데 또 무엇이 나겠는가?
그러나 본래 나란 것은 없다.
나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地水火風)가 흩어지고 나면 나란 주체가 없다는 것은 증명된다.
그런데 미묘하게도 연기하여
내가 나타났다.
나의 손과 팔과 다리와 발과
몸통과 머리가 모여
아무개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게 된 것이다.
그것들이 흩어지고 나면
나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어디서 온 것인가?
그런 면에서 볼 때 내가 났다는 말은 맞지 않다.
내가 없는데 무엇이 난 것인가?
한 줌의 흙을 나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분명히 나가 아니다.
나가 있다면 멸함이 있어야 하나, 나가 없다면
역시 멸함이 없다.
멸할 나가 없기 때문이다.
조사들은 게송에서 읊는다.
남이란 한 낱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낱 뜬 구름이 멸함이로다.
뜬구름 자체도 실다움이 없나니
생사(生死)를 거래함도 이와 같아라.
내가 온 것이 없이 와서
내가 가는 곳이 없이 간다는 뜻이다.
본래 생이라거나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아는 것을 불생지실견(不生之實見)이라 한다.
남이 없다고 보는 참다운 견해라 한다.
무엇을 불상역부단(不常亦不㫁)이라 하는가?
항상 하다는 것은
항구적 존재란 말이다.
형태나 본질이 영구적이란 말이다.
항상 존재함인 상(相)과 금방 사라짐인 단멸은
바른 소견이 아니라 삿된 견해이다.
항구적인 것은 없다.
이것이 진리일 뿐이다.
불자는 이렇게 살펴서 깨달아야 한다.
항상 하다는 개념은 아는데
단멸(斷滅)이란 말은 무엇인가?
죽으면 그만이다 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죽으면 그만인가? 아니다.
법은 존재한다. 무(無)로서 존재한다.
언제든 다시 연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다.
그러나 그것은 유물론적 존재의 이어짐이 아니라
법리적 존재의 이어짐이다.
이 이론에는 많은 현대적 관점의 시비가 있다.
그것이 윤회를 뜻한 것 아니냐 하고 말이다.
그러나 중론은 윤회를 완전히 부정하였다.
중도란 일체의 변견을 취하지 않는다.
팔불(八不)은 팔사(八邪)의 배척이다.
항구적이라면 난 소리는 사라지지 안아야 한다.
없어지고 마는 소리라면
다시 소리라는 것이 나지 안아야 한다.
그렇다면 단멸(斷滅)도 상주(常住)도 아니다.
여기서 날카롭게 살펴보면
이전의 소리와 이후의 소리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소리를 기계적으로 같은 소리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컴퓨터로 같은 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르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녹음기를 반복해서 틀면
같은 볼륨으로
같은 속도로 틀면
같은 소리가 난다.
그렇다면 소리라는 것이 사라짐 속에 영원히 잠기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이해할 것이다.
좀 더 정밀하게 추궁을 하여도 마찬가지이다.
단멸하지 않는다.
항상하지도 단멸하지도 않는다.
그 세계가 매우 무서운 세계란 뜻이다.
인과 율이 철저히 적용되는 세계란 뜻이다.
중론에서는 인과를 부정한다. 그것은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완전한 긍정에 이르는 것이었다.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의 허를 찌르는 말이다.
동일하지도 않다는 것은
아까 말한 이전의 소리와 이후의 소리가 동일 한가에서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어서 다르지도 않다는 것은
동일하다는 뜻이다.
소리로서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법으로서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도올이 무식하기 때문에
이해를 못한 것이다.
불래역불출(不來亦不出)이란 말은
앞서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말과 같다.
래(來)란 온다는 말이다. 그러나 온다는 말은 없다.
오는 놈이 없기 때문에 온다는 것은 없다.
온다는 행위도 없다. 오는 주체가 없으니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다. 온다 하면 온다는 것인데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오지 않은 것이요,
이미 왔다면 그것도 또한 오는 것이 아니다.
괴변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잘 사유해 보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시점의 관점 뿐이나
이도 역시 실존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현재심을 얻을 수 없고
과거심을 얻을 수 없고
미래심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본유적 존재는 없다.
없는 놈이 오는 것은 아니다.
없는 놈이 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길래 황소가 뚜벅뚜벅 온다고 하는가?
우리가 인식의 안에서
인식이 반영한 것을 놓고 볼 때 온다는 말은
맞지 않다. 오는 것이 본래 없다.
간다는 말도 맞지 않다. 본래 감이란 없다.
무엇이 가고 무엇이 오는가?
우리가 아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런데 온다. 그래도 그것은 환일 따름이다.
인정하라! 그리고 사유하라!
이해될 때까지
사유하면 반드시 이해가 된다.
不一亦不異(불일역불이), 不來亦不出(불래역불출)
산사지기::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으며
동일(同一)되어 있음도 아니요 다름이 있음도 아미며
옴도 아니요 또한 가는 것도 아니로다.
강론::
불생(不生)이란 무생(無生)을 뜻한다.
즉 남이 없음을 이른 말이다.
그렇다면 난다는 것은 무엇이 나며
나는 현상은 무엇을 말하기에
남이 없다 결론 지은 것일까?
나는 주체가 있는가?
우리는 난다는 것은
태어남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래 주체가 있다면 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본래 내가 있어서 난 것인가?
내가 없는데 잠시 나타난 것인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나는 주체가 있는가부터 논하겠다.
내가 주체가 있다면
난다는 일은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란 것이 있는데 또 무엇이 나겠는가?
그러나 본래 나란 것은 없다.
나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地水火風)가 흩어지고 나면 나란 주체가 없다는 것은 증명된다.
그런데 미묘하게도 연기하여
내가 나타났다.
나의 손과 팔과 다리와 발과
몸통과 머리가 모여
아무개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게 된 것이다.
그것들이 흩어지고 나면
나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어디서 온 것인가?
그런 면에서 볼 때 내가 났다는 말은 맞지 않다.
내가 없는데 무엇이 난 것인가?
한 줌의 흙을 나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분명히 나가 아니다.
나가 있다면 멸함이 있어야 하나, 나가 없다면
역시 멸함이 없다.
멸할 나가 없기 때문이다.
조사들은 게송에서 읊는다.
남이란 한 낱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낱 뜬 구름이 멸함이로다.
뜬구름 자체도 실다움이 없나니
생사(生死)를 거래함도 이와 같아라.
내가 온 것이 없이 와서
내가 가는 곳이 없이 간다는 뜻이다.
본래 생이라거나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아는 것을 불생지실견(不生之實見)이라 한다.
남이 없다고 보는 참다운 견해라 한다.
무엇을 불상역부단(不常亦不㫁)이라 하는가?
항상 하다는 것은
항구적 존재란 말이다.
형태나 본질이 영구적이란 말이다.
항상 존재함인 상(相)과 금방 사라짐인 단멸은
바른 소견이 아니라 삿된 견해이다.
항구적인 것은 없다.
이것이 진리일 뿐이다.
불자는 이렇게 살펴서 깨달아야 한다.
항상 하다는 개념은 아는데
단멸(斷滅)이란 말은 무엇인가?
죽으면 그만이다 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죽으면 그만인가? 아니다.
법은 존재한다. 무(無)로서 존재한다.
언제든 다시 연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다.
그러나 그것은 유물론적 존재의 이어짐이 아니라
법리적 존재의 이어짐이다.
이 이론에는 많은 현대적 관점의 시비가 있다.
그것이 윤회를 뜻한 것 아니냐 하고 말이다.
그러나 중론은 윤회를 완전히 부정하였다.
중도란 일체의 변견을 취하지 않는다.
팔불(八不)은 팔사(八邪)의 배척이다.
항구적이라면 난 소리는 사라지지 안아야 한다.
없어지고 마는 소리라면
다시 소리라는 것이 나지 안아야 한다.
그렇다면 단멸(斷滅)도 상주(常住)도 아니다.
여기서 날카롭게 살펴보면
이전의 소리와 이후의 소리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소리를 기계적으로 같은 소리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컴퓨터로 같은 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르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녹음기를 반복해서 틀면
같은 볼륨으로
같은 속도로 틀면
같은 소리가 난다.
그렇다면 소리라는 것이 사라짐 속에 영원히 잠기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이해할 것이다.
좀 더 정밀하게 추궁을 하여도 마찬가지이다.
단멸하지 않는다.
항상하지도 단멸하지도 않는다.
그 세계가 매우 무서운 세계란 뜻이다.
인과 율이 철저히 적용되는 세계란 뜻이다.
중론에서는 인과를 부정한다. 그것은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완전한 긍정에 이르는 것이었다.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의 허를 찌르는 말이다.
동일하지도 않다는 것은
아까 말한 이전의 소리와 이후의 소리가 동일 한가에서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어서 다르지도 않다는 것은
동일하다는 뜻이다.
소리로서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법으로서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도올이 무식하기 때문에
이해를 못한 것이다.
불래역불출(不來亦不出)이란 말은
앞서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말과 같다.
래(來)란 온다는 말이다. 그러나 온다는 말은 없다.
오는 놈이 없기 때문에 온다는 것은 없다.
온다는 행위도 없다. 오는 주체가 없으니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다. 온다 하면 온다는 것인데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오지 않은 것이요,
이미 왔다면 그것도 또한 오는 것이 아니다.
괴변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잘 사유해 보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시점의 관점 뿐이나
이도 역시 실존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현재심을 얻을 수 없고
과거심을 얻을 수 없고
미래심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본유적 존재는 없다.
없는 놈이 오는 것은 아니다.
없는 놈이 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길래 황소가 뚜벅뚜벅 온다고 하는가?
우리가 인식의 안에서
인식이 반영한 것을 놓고 볼 때 온다는 말은
맞지 않다. 오는 것이 본래 없다.
간다는 말도 맞지 않다. 본래 감이란 없다.
무엇이 가고 무엇이 오는가?
우리가 아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런데 온다. 그래도 그것은 환일 따름이다.
인정하라! 그리고 사유하라!
이해될 때까지
사유하면 반드시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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