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보살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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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423회 작성일 13-07-03 20:10본문
나가르주나 사후에 두 세기가 흘러, 불교 저술 활동의 또 하나의 황금기가 도래하자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아비다르마의 주석서들을 연구
설일체유부 논사들과 경량부 논사들의 입장을 비교하여 평가할수 있었던
설일체유부의 유명한 대표자인 상가바드라
상가바드라(Sanghabhadra)가 죽을 때까지 이 두 사람의
스테판 아나커가 최근 출간한 ‘불교의 심리 의사 바수반두의 일곱 가지 저서’ 들은 특히 그의 일곱 가지 주저들
나가르주나와 바수반두사이의 관계에 관한 한, 이들 둘 사이의 불일치는 그들 두 스승을 따르던 6게기경의 후계자들 간의 불일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아나커의 시각은 올바르다. 하지만아나커는 나가르주나가 ‘인과성 전체의 부정’에 빠져 있다고
반수반두가 그의 이복형 아상가(Asanga, 無着)로 인해 유가행자(Yogacara)로 전향하게 되었으리라는 추정
문제들은 아마도 6~7세기경의 바수반두 제자들의 오해로 말미암아, 철학적으로 가장 세련된 그의 저서인 유식론(Vijnaptimatratasiddhi)이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복잡하게 뒤엉키게 되었을 것이다.
스티라마티(sthiramati)나 다르마팔라(Dharmapala)와 같은 주석자들에 의해 원본이 손상된 이후에야 완성된 것들이다.
예를 들어 붓다는 사유(citta)와 정신(mano)과 의식(vinnana)이라는 용어들을 결코 동의어로 여기지 않았다. 산스크리트로 된 ‘삼십송’에 대한 바수반두 자신의 주석서 속의 게송들을 볼때,
말로 명칭(sankha)이나 시설(pannatti)이라는
즉 인지(vijnana)를 통해 입수 가능한 것을 표시해 주는 수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사유(citta)정신(manas)의식((vijnana)표시(vijnapti)-이 한 묶음으로 처리
‘불교 심리학의 원리들(The Principles of Buddhist Psychology, 1987)에서 표명했던 생각들에 기초하여, 바수반두의 ’유식론’- 심오함
나가르주나의 ‘중론’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동일성(svabhava)과 차이성(parabhava)이라는 이론들을 비판하는데 거의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아비다르마나 ‘금강경’ 같은 이진의 가르침들 속에서 제시되는 해결책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특수자(svalaksana)와 보편자(samanyalaksana)를 문제시한다. 우리는 앞에서 ‘법화경’이 어떻게 개념적 절대주의를 옹호했는지에 관해 살펴본 적이 있다. 관념론적이고 초월론적인 ‘능가경’에서는 참다운 인식이란 비개념적인 것이라고 설명됨으로써, 성문과 연각의 인식은 특수자와 보편자에 제한된 것이라는 비난이 자주 거론되었다.
아상가의 ‘아비달마집론(Abhidharmasamucca-ya)’은 ‘능가경’과 똑같은 철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되어왔다. 만약 바수반두가 비개념적인 진리나 실재를 인정하였다면, 우리는 아상가가 자신의 이복동생을 경량부의 입장으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데서뿐만
관념론적인 태도를 실제로는 거부하였다면, 그는 특수자와 보편자라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과감히 맞서서, 개념이 실제적 특수자나 공허한 보편자로 악화되는 것을 방지해야만 했을 것이다.
실재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sad artha)은 상식일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전제 조건이다.
바수반두는 “이 모든 것은 개념일 뿐이다(vijnapti-matram evaitad)\"라고 주장한다. 마트라(matra, ‘오직’, ‘뿐’, 唯)라는 용어의 철학적인 의의에 대해서는 앞에서 경험 대상에 관한 붓다의 설명이나 개념에 대한 그의 정의와 관련하여 검토한 적이 있었다.
‘개념일 뿐임의 확립(vijnapti-matrata-siddhi, 成唯識)’이라는 이러한 철학적인 성취는 단순한 사변에 의해서가 아니라, 붓다의 전문 분야(buddha-gocara)를 따라감으로써, 즉 인간경험의 심리학을 분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모든 관련들은 식(vijnana)에 의존하여 일어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즉각 관념론자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식의 전변(vijnana-parinama)에 관해 말함으로써 이것을 조심스럽게 피해가고 있다.
성숙은 알라야식과 동의어이며, 식의 모든 종자들(saryabi-jaka)의 전달자라고도 정의된다.
알라야식의 전변은 경험세계에 대한 인간의 행위 반응(karma)에 따라 축적된 성향상의 경향들(vasana)에 의하여 결정되는데
그에게 알라야식은 ‘능가경’에서 주장하듯이 ‘본래부터 밝고 깨끗한 것[本性淸淨]’이 분명 아니다.
그는 자아(atman)와 대상(dharma)이라는 그릇된 개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라야식이 대상 개념(upadi)과 장소(sthana)에 의해 확인되거나 고정화되지는 않는다고 주장을 한다.
그가 알라야식의 맥락 내에서 자유(nirvana)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싶어한다는 데 있다.
나가르주나가 대상의 가라앉음(drastavyopasama)을 일차적으로 강조했는지에 대해서 이미 살펴본 적이 있다. 그는 ‘중론’의 전반부 15개 장들을 이런 목적에 할애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개별적인 자아(pudgala)에 관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개념으로 고정화되는 경향이 있는 식의 소멸(vyavrtti)에 관한 언급을 한다
(가장 넓은 의미의 담마[dhamma]이 정신(mano)을 일종의 전제조건으로서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붓다가 정신을 다른감각 기관들(눈, 귀.코.혀.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관(indriya)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그는 정신을 사량의 기능(mannatiti mano)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세계가 종종 ‘객관적 인력’ 이라고도 불리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지각하는의식’에게 행사한다는 사실이 결코 부정되고 있지 않다.
바수반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대상의 의식(vijnana)이 아니라, 인지적 자각에 기초하여 형성되는 개념(vijnapti)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제한된 유한성에서 생겨나는 불안감 때문에, 인간은 자주 그것들의 경계를 넘어, 영원한 자아나 불변적 실체라는 개념들을 요청한다. 이것이 갈망으로 되며
자아라는 견해, 자아에 관한 무지, 자아에 대한 자만, 자아에 대한 애착 등의 네 가지 염오를 일으킨다.
이러한 네 가지의 염오는 훌륭한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릇된 견해와 무지와 자만과 애착 등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것은 만약 네 가지의 염오가 제거 될 때에는 자아의 개념이 결코 깨지지 않는 대상의 차원으로 비약되지 않고도 경험적인 차원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객체에 관한 것이든 잘못된 개념(parikalpita)일 따름이다. 주체와 객체 사잉의 상호 의존성은 개념과 의식사이의 상호 의존성에도 반영되어 있다.
아비다르마의 주석서들을 연구
설일체유부 논사들과 경량부 논사들의 입장을 비교하여 평가할수 있었던
설일체유부의 유명한 대표자인 상가바드라
상가바드라(Sanghabhadra)가 죽을 때까지 이 두 사람의
스테판 아나커가 최근 출간한 ‘불교의 심리 의사 바수반두의 일곱 가지 저서’ 들은 특히 그의 일곱 가지 주저들
나가르주나와 바수반두사이의 관계에 관한 한, 이들 둘 사이의 불일치는 그들 두 스승을 따르던 6게기경의 후계자들 간의 불일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아나커의 시각은 올바르다. 하지만아나커는 나가르주나가 ‘인과성 전체의 부정’에 빠져 있다고
반수반두가 그의 이복형 아상가(Asanga, 無着)로 인해 유가행자(Yogacara)로 전향하게 되었으리라는 추정
문제들은 아마도 6~7세기경의 바수반두 제자들의 오해로 말미암아, 철학적으로 가장 세련된 그의 저서인 유식론(Vijnaptimatratasiddhi)이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복잡하게 뒤엉키게 되었을 것이다.
스티라마티(sthiramati)나 다르마팔라(Dharmapala)와 같은 주석자들에 의해 원본이 손상된 이후에야 완성된 것들이다.
예를 들어 붓다는 사유(citta)와 정신(mano)과 의식(vinnana)이라는 용어들을 결코 동의어로 여기지 않았다. 산스크리트로 된 ‘삼십송’에 대한 바수반두 자신의 주석서 속의 게송들을 볼때,
말로 명칭(sankha)이나 시설(pannatti)이라는
즉 인지(vijnana)를 통해 입수 가능한 것을 표시해 주는 수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사유(citta)정신(manas)의식((vijnana)표시(vijnapti)-이 한 묶음으로 처리
‘불교 심리학의 원리들(The Principles of Buddhist Psychology, 1987)에서 표명했던 생각들에 기초하여, 바수반두의 ’유식론’- 심오함
나가르주나의 ‘중론’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동일성(svabhava)과 차이성(parabhava)이라는 이론들을 비판하는데 거의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아비다르마나 ‘금강경’ 같은 이진의 가르침들 속에서 제시되는 해결책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특수자(svalaksana)와 보편자(samanyalaksana)를 문제시한다. 우리는 앞에서 ‘법화경’이 어떻게 개념적 절대주의를 옹호했는지에 관해 살펴본 적이 있다. 관념론적이고 초월론적인 ‘능가경’에서는 참다운 인식이란 비개념적인 것이라고 설명됨으로써, 성문과 연각의 인식은 특수자와 보편자에 제한된 것이라는 비난이 자주 거론되었다.
아상가의 ‘아비달마집론(Abhidharmasamucca-ya)’은 ‘능가경’과 똑같은 철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되어왔다. 만약 바수반두가 비개념적인 진리나 실재를 인정하였다면, 우리는 아상가가 자신의 이복동생을 경량부의 입장으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데서뿐만
관념론적인 태도를 실제로는 거부하였다면, 그는 특수자와 보편자라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과감히 맞서서, 개념이 실제적 특수자나 공허한 보편자로 악화되는 것을 방지해야만 했을 것이다.
실재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sad artha)은 상식일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전제 조건이다.
바수반두는 “이 모든 것은 개념일 뿐이다(vijnapti-matram evaitad)\"라고 주장한다. 마트라(matra, ‘오직’, ‘뿐’, 唯)라는 용어의 철학적인 의의에 대해서는 앞에서 경험 대상에 관한 붓다의 설명이나 개념에 대한 그의 정의와 관련하여 검토한 적이 있었다.
‘개념일 뿐임의 확립(vijnapti-matrata-siddhi, 成唯識)’이라는 이러한 철학적인 성취는 단순한 사변에 의해서가 아니라, 붓다의 전문 분야(buddha-gocara)를 따라감으로써, 즉 인간경험의 심리학을 분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모든 관련들은 식(vijnana)에 의존하여 일어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즉각 관념론자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식의 전변(vijnana-parinama)에 관해 말함으로써 이것을 조심스럽게 피해가고 있다.
성숙은 알라야식과 동의어이며, 식의 모든 종자들(saryabi-jaka)의 전달자라고도 정의된다.
알라야식의 전변은 경험세계에 대한 인간의 행위 반응(karma)에 따라 축적된 성향상의 경향들(vasana)에 의하여 결정되는데
그에게 알라야식은 ‘능가경’에서 주장하듯이 ‘본래부터 밝고 깨끗한 것[本性淸淨]’이 분명 아니다.
그는 자아(atman)와 대상(dharma)이라는 그릇된 개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라야식이 대상 개념(upadi)과 장소(sthana)에 의해 확인되거나 고정화되지는 않는다고 주장을 한다.
그가 알라야식의 맥락 내에서 자유(nirvana)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싶어한다는 데 있다.
나가르주나가 대상의 가라앉음(drastavyopasama)을 일차적으로 강조했는지에 대해서 이미 살펴본 적이 있다. 그는 ‘중론’의 전반부 15개 장들을 이런 목적에 할애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개별적인 자아(pudgala)에 관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개념으로 고정화되는 경향이 있는 식의 소멸(vyavrtti)에 관한 언급을 한다
(가장 넓은 의미의 담마[dhamma]이 정신(mano)을 일종의 전제조건으로서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붓다가 정신을 다른감각 기관들(눈, 귀.코.혀.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관(indriya)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그는 정신을 사량의 기능(mannatiti mano)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세계가 종종 ‘객관적 인력’ 이라고도 불리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지각하는의식’에게 행사한다는 사실이 결코 부정되고 있지 않다.
바수반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대상의 의식(vijnana)이 아니라, 인지적 자각에 기초하여 형성되는 개념(vijnapti)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제한된 유한성에서 생겨나는 불안감 때문에, 인간은 자주 그것들의 경계를 넘어, 영원한 자아나 불변적 실체라는 개념들을 요청한다. 이것이 갈망으로 되며
자아라는 견해, 자아에 관한 무지, 자아에 대한 자만, 자아에 대한 애착 등의 네 가지 염오를 일으킨다.
이러한 네 가지의 염오는 훌륭한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릇된 견해와 무지와 자만과 애착 등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것은 만약 네 가지의 염오가 제거 될 때에는 자아의 개념이 결코 깨지지 않는 대상의 차원으로 비약되지 않고도 경험적인 차원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객체에 관한 것이든 잘못된 개념(parikalpita)일 따름이다. 주체와 객체 사잉의 상호 의존성은 개념과 의식사이의 상호 의존성에도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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