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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 윤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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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조 댓글 0건 조회 6,346회 작성일 13-06-1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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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론: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업을 짓는 것인가?
세친: 내가 응당 고락苦樂의 과보를 향수하기 때문이다.
승론: 그 때 \'나(我)\'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친 : 그것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자아관념 즉 아집我執의 대상일 뿐이다.
승론: 무엇을 자아관념의 대상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세친: 이를테면 제온諸蘊의 상속이다.
승론: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세친: \'나\'라고 하는 관념은 제온에 대한 애탐의 결과이며, 또한 반드시 \'희다\'는 등의 지각과 더불어 동일한 공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간에서 \'나는 희다\' \'나는 검다\' \'나는 늙었다\' \'나는 젊었다\' \'나는 야위었다\' \'나는 뚱뚱하다\'고 말한다. 즉 현실적으로 \'희다\'는 등의 지각과 자아관념은 동일한 공간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그대가 주장하는 자아 또한 결코 지각과 차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아관념은 다만 제온을 조건으로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중략)
승론: 만약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라고 하는 관념은 누구의 것인가?
세친: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다. 즉 이 때 \'누구의\'라고 하는 소유격은, 이를테면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소\'라고 하듯이 다만 관념을 부리는(일어나게 하고 일어나지 않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관념을 낳는 원인(즉 제법)이 관념의 주인이라고 할 것인가?

자아란 다면 경험을 통해 확인되는 것으로서, 그 같은 경험의 조건인 5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란 다만 5온의 상속을 일시 가설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비록 무아이지만 번뇌와 업의 의해 중유의 제온이 상속하여 어머니 탯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불이 존재하기 때문에 타는 것이 아니라 타는 그것을 일컬어 불이라 하며, 강이 존재하기 때문에 강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을 강이라고 한다는 사실은 응당 그러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아의 경우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의 문제이고, 기나긴 윤회의 세월을 거치면서 이기성에 따른 탐욕과 집착, 그리고 언어적 습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리한 통찰과 그에 다른 강력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설사 안다고 하여도 그것은 다만 개념적 이해일 뿐 그에 따른 삶의 질적 변화는 초래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우리 범부들을 대개 드러난 현실만을 알며, 거기에 묶여 있을 뿐이다. 때문에 지금의 나의 생각과 사랑을 나의 모든 것이라 여긴다.
또한 \'나의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진실하다고 여긴다. 또한 세친의 예리한 분석대로 여기서 \'나\'란 그 같은 생각과 사랑을 일으키는 원인의 의미를 갖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사랑을 일으키는 원인은 \'나\'인가? 우리는 차마 생각하기 싫은 것도 생각하며, 사랑하고 싶어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하기도 한다. 왜일까? 그것은 생각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며, 사랑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과 사랑은 수많은 조건 즉 제법諸法의 산물이다.

파구나가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누가 사랑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파구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사랑(愛)하는 자에 대해 설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사랑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설하였다면 그대는 마땅히 \'누가 사랑하는가?\'라고 물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대는 마땅히 \'무엇을 조건(인연)으로 하여 사랑이 있게 된 것인가?\'라고 물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응당 느낌(受)을 조건으로 하여 사랑이 있으며, 사랑을 조건으로 하여 집착(取)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따라서 생각과 사랑에 실체성은 없으며, 나의 생각도 나의 사랑도 아니다. 또한 영속적이지도 않으며 단일하지도 않다. 어제의 행복하였던 마음은 오늘 절망의 마음으로 변하기도 하며, 어제의 사랑은 오늘 미움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생각, 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거기에 집착하고 도한 절망한다. 그리고 그에 다른 또 다른 번뇌와 업을 야기하고, 이에 따라 또 다른 세계로 윤회한다.
세친은 ≪구사론≫ <파아품> 첫머리에서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유아론有我論에 따르는 한 결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한 그에 집착함으로써 온갖 번뇌와 업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끝없이 유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들이 한편으로는 인간이 구원되어야 할 영원한 자아(혹은 영혼)를 갖고 있다고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비와 관용이라는 비이기성을 가르치고 있다. 자아를 갖는 한 이기성은 필연적인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전자는 대아大我이며, 후자는 소아小我라고, 혹은 전자는 보편적인 자아이고 후자는 개별적인 자아라고, 그렇다면 이같이 모순된 두 자아가 어떻게 서로 양립될 수 있을 것인가? \'존재론과 윤리학은 양립된 수 없는 것인가?\'-고래로 철학의 관심은 온통 여기에 집중되어 왔지만, 그러나 적어도 불타에 의하는 한 그것은 희론이다.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영속 단일 보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를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보편성(同分) 내지 언어(名)라고 하는 개별적 존재(즉 법)가 관계하기 때문이다. 자아를 비롯한 그 같은 보편의 존재는 다만 미망의 산물일 뿐이다.

인간(중생)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작자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생겨났으며, 죽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는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바로 악마의 견해
그것은 다만 몇 가지 허망한 요소의 집합일 뿐, 거기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여러 부품이 화합한 것, 세간에서는 그것을 일컬어 수레라고 하듯이
온갖 온이 인연에 따라 화합한 것, 그것을 이시 인간이라 이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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