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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佛敎 고구려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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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흥사 댓글 5건 조회 11,535회 작성일 20-02-2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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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불교 佛敎는 인도나 중국 불교의 단순한 연장이나 퇴화가 아니다.

삼국 시대에 전래된 불교 佛敎는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해서 만주 대륙과 한반도 등의 우리 민족 문화권에로 동류 東流한 뒤 우리 나라의 지역과 풍토 및 민족성 안에서 독특하게 전개 되었다.

삼국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불교 佛敎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 이다.

372년 소수림 왕 2년 여름인 6월 전진 前秦의 왕 부견 符堅 은 순도 順道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 하였다.

이에 소수림 왕은 사신을 보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교육을 가르치게 하였다.

2년 뒤인 374년에는 진나라의 승려 아도 阿道가 고구려로 왔다.

소수림 왕은 그 이듬해 봄에 성문사 省門寺와 이불란사 伊佛蘭寺를 세우고 순도와 아도를 각각 그 절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 두 절은 우리 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절이다.

고구려 에서 처음 받아들인 불교 佛敎는 인과적 因果的 교리로 불교 佛敎 또는 구복 求福으로서의 불교 佛敎라 하는데 이는 재래의 우리 토속 신앙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기 때문 이다.

특히 삼국 중에서 고구려가 불교 佛敎를 가장 먼저 받아 들여 새로운 관념 형태를 형성 함으로써 삼국 중 가장 먼저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 형성의 기틀을 잡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 이었다.

그리고 391년 고국양왕 8년 영을 내려서 불교 佛敎를 숭신 崇信하여 구복하게 함으로써 불교 佛敎를 더욱 장려 하였다.

백제에는 고구려 보다 12년 뒤인 384년 침류왕 1년에 불교 佛敎가 전래 되었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 摩羅難陀가 동진 東晉으로 부터 바다를 건너서 서울인 광주 廣州의 남한산으로 들어오자 왕은 그를 궁 안에 머물도록 하였고 그 이듬해 10명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160여 년이 경과한 성왕 때 까지는 불교 佛敎 관계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다가 526년 성왕 4년에 인도로 부터 귀국한 겸익 謙益을 맞이 함으로써 크게 발전을 보았다.

신라의 불교 佛敎 수용은 순탄하지 않았다.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을 배경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눌지 마립간 때에 고구려 로 부터 묵호자 墨胡子가 신라의 서북경 지방인 일선군 一善郡 지금에 선산 善山에 들어와 모례 毛禮의 집에 기숙 하면서 불법을 전 하였으며 모례는 신라 인으로서 최초의 신도가 되었다.

그때 중국의 사신이 향 香을 가지고 왔으므로 묵호자가 나아가 분향예불 焚香禮佛 하는 법을 가르치고 공주의 병을 완쾌 시킴으로써 신라 왕실에서도 불교 佛敎를 알게 되었으나 별로 신도를 얻지 못 하였다.

그 뒤 소지 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 阿道가 들어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는 신봉하는 자가 늘어 났다.

신라에 왔던 아도는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 와 동명이인 同名異人 으로 그 당시에 아도 라는 이름은 머리가 없는 자 라는 뜻으로 삭발승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보고 있다.

그 뒤에도 신라 왕실은 불교 佛敎 공인을 위하여 노력 하였으나 씨족 중심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 갔다.

그러나 그 씨족 적 기반을 억누르고 중앙 집권적 국가를 확립 하고자 했던 왕실파 王室派 들은 법흥왕 중심으로 불교 佛敎를 새 지배 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서 왕법 王法과 불법 佛法을 동일시 하고 부처의 위력을 왕의 위력으로 대치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 하고자 하였다.

520년 법흥왕 7년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조직에 관한 정비를 일단락 지은 법흥왕은 527년에 이차돈 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배불파 排佛派를 제압하고 공인 불교 佛敎을 선포 하였으며 529년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7년 뒤에는 그가 절을 만들고자 했던 천경림 天鏡林에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 興輪寺를 창건 하였고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 法空 이라고 불렀다.

이때의 불교는 선행수복 善行受福 으로서의 불교 佛敎 인과적 교리로서의 불교 佛敎에서 벗어나지 못 하였고 고구려의 경우 처럼 토속 신앙과 자연 스럽게 혼합 되었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불교 佛敎는 고국양왕이 불교 佛敎를 신봉 하라는 영을 내린 이듬해 392년 광개토왕 2년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 하였고 395년 진나라 승려 담시 曇始가 교화를 위해 고구려로 왔다.

담시는 불교 佛敎의 교리 연구 및 설법의 이해에 필요한 경률 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왔고 수계 授戒를 베풀어 불 제자가 되는 길을 트이게 함으로써 고구려 불교 佛敎 역사상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맞게 하였다.

498년 문자왕 7년에는 대동강 변에 금강사 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 하였으며 576년 평원왕 18년 에는 의연 義淵을 중국 북제로 보내어 정국사 定國寺의 법상 法上에게 불기 佛紀및 중국의 불교 佛敎 전래 등 불교 佛敎의 역사 전개와 교학 敎學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배우게 하였다.

그는 대승론서 大乘論書의 저자 및 저술 연기 緣起 그 저술이 갖는 영험 등에 관한 것을 자세히 배워 가지고 돌아 왔는데 그가 관심을 가지고 새로 가져온 경론 經論 들은 후일에 신라의 학승들이 철학의 전거로 삼아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의 불교 佛敎도 27대 영류왕 때에 들어온 도교의 득세로 말미 암아 점차 빛을 잃고 말았다.

도교는 624년 영류왕 7년에 들어 왔으며 643년 보장왕 2년에 연개소문 淵蓋蘇文이 당나라로 부터 숙달 叔達 등 8명의 도사와 노자 도덕경 老子道德經 을 받아 들인 뒤 부터는 불교 佛敎를 박대 하였다.

사찰을 몰수하여 도관 道館으로 삼았고 그때까지 불교인을 대우하던 자리에 도교인을 앉히는 등 불교 佛敎에 대한 박해가 극심 하였다.

이 갑작 스러운 변동에 불교 佛敎 인들 중에는 견디다 못해 외국으로 망명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보덕 普德은 이를 고구려 멸망의 징조로 여기고 여러 차례 조정에 간 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당시 백제 땅인 완산주 完山州 전주 全州의 고대산 孤大山 지금의 高達山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 뒤 고구려는 곧 멸망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승려가 외국으로 나가서 불교 佛敎 문화 활동을 한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중국으로 가서 구법 활동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의 전교활동 傳敎活動 이다.

중국으로 가서 법을 구한 승려는 의연을 비롯하여 몇 명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고구려의 고승 이었던 승랑 僧朗은 장수왕 말년경에 중국으로 가서 삼론학 三論學 을 공부한 뒤 중국 삼론종의 종주 宗主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삼론 新三論을 학문 적으로 체계화 하여 확립 시켰다.

삼론종은 중론 中論 십이문론 十二門論 광백론 廣百論의 삼론에 의거하여 반야 중도 사상 般若中道思想을 강조한 종파로 승랑 이전 까지는 삼론과 성실론 成實論을 함께 취급하여 승랑이 성실론을 삼론과 완전히 분리 시키고 새로운 학문적 체계를 마련 하였던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인을 가르친 승랑이 중국 불교 佛敎 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 하였다.

이 밖에도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서 유명한 수나라의 지의에게서 공부한 뒤 그곳에서 영이 靈異와 기서 奇瑞를 보이다가 세상을 떠난 파야 波若와 중국 승려인 스승과 함께 인도로 갔던 현유 玄遊는 사자국 獅子國 스리랑카에 까지 가서 살았다고 전한다.

6세기 중엽 이래로 고구려의 왕실과 조정이 불교 佛敎를 등한히 하고 박해 하는 태도를 노골화 하자 많은 승려들은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 들였던 고구려에서 그 뿌리를 제대로 펴지 못한 채 거기서 길러진 고승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른 나라에서 그 뜻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양원왕 때에 신라로 온 혜량 惠亮은 찬란한 신라 불교의 밑거름 구실을 하였다.

일본 포교에 힘쓴 고구려 승려들로 서는 혜편 惠便 혜자 惠慈 승륭 僧隆 담징 曇徵 혜관 慧灌 도등 道登 도현 道顯 등이 있다.

혜편은 584년에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의 요청으로 시바다쓰 司馬達의 딸인 선신 善信과 선장 禪藏 혜선 慧善 을 가르쳐 출가 시킴으로써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그가 일본 최초의 비구니를 탄생 시킨 것이다.

혜자는 595년 고구려의 승려로서 일본에 귀화하여 불교 佛敎를 크게 진흥한 쇼토쿠태자 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백제의 승려 혜종과 더불어 호코사 法興寺 를 창건 하였다.

이 절은 뒤에 계속 많이 건너온 고구려와 백제 승려들의 거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을 불교 佛敎화 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또 담징은 유교의 오경 五經에 통달해 있었을 뿐 아니라 공예 채색 지묵 紙墨에도 능하여 일본 미술사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혜관은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강코사 元興寺에 머물면서 반야 중도 사상을 천명하고 삼론 三論을 강의하여 심오한 불교 佛敎 철학을 일본에 심어준 승려 이다.

일본의 사서 史書에는 큰 가뭄을 맞았을 때 혜관이 기우 祈雨를 하여 큰비를 내리게 한 공로로 승정 僧正에 뽑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등 역시 삼론종의 승려로서 일찍이 당나라로 들어가 길장 吉藏으로 부터 삼론의 뜻을 배운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우지강 宇治川에 큰 다리를 건설 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다리로 서가 아니라 중생을 피안으로 건네 준다는 종교적 의미로 일본 왕의 고사 古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말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도현은 칙명으로 다이안사 大安寺에 머물면서 불법을 펴는 한편 일본세기 日本世記 등 몇 권의 책을 저술 하였다.

이 밖에도 적지 않은 승려들이 일본에 가서 활약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 에서도 유학승을 보내어 고구려의 불교 佛敎 문화를 배워 갔다.


      오늘도 행복한 날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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